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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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궁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S스토리]

문화재 夜行, 격조 있는 ‘밤문화’ 되다 / 창덕궁 달빛기행 등 도심 속 ‘풍류’ / 조명 비춘 문화재, 공연 무대 변신 / 특유의 정취 만끽… 관람객 북적
“원더풀(wonderful)”

지난달 28일 창덕궁 달빛기행에 참여한 홍콩 관광객 로윙얀(여)씨의 감상이다. 관광객 특유의 약간은 ‘과장된’ 감상, 혹은 외국 문물에 대한 의례적인 립서비스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경험한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약간의 조명을 더한 밤의 창덕궁은 더할 나위 없는 풍경과 특별한 정취를 만들어낸다. “창덕궁의 역사를 알게 돼 더욱 좋았다”는 그녀의 말처럼 올해의 마지막인 이날의 달빛기행을 찾은 외국인 관람객들은 낙선재가 품은 헌종과 경빈김씨의 로맨스, 궁궐 지붕 잡상 이야기 등 해설사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고 작은 탄성과 웃음을 지었다.

지난달 28일 열린 창덕궁 달빛기행에 참가한 관람객들의 부용지에 비친 주합루를 바라보며 궁궐의 야경을 감상하고 있다.
달빛기행이 열리기 이틀 전인 26일, 전남 목포시 근대역사관 야외에서 시립교향악단의 연주회가 열렸다. 사회자는 “아버지 세대에서 가장 좋아하는 팝송”이라며 ‘마이 웨이’를 세 번째 곡으로 소개했다. 근대역사관의 붉은 벽돌은 따뜻한 배경이 되었고, 정원수의 가지는 지붕인 듯 무대는 소박했지만 근사했다. 음악을 감상한 이들은 역사관 인근에서 열리고 있는 ‘목포야행’을 즐길 것이다. 목포의 구도심으로 근대역사의 흔적이 짙은 역사관 주변은 이날 올해 두 번째 야행이 열려 시민들과 관광객들로 북적였다.
지난달 26일 전남 목포에서 열린 목포 야행의 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된 근대역사관의 음악회를 시민들이 즐기고 있다.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약간의 관심만 갖고 찾아보면 역사와 문화재로 흥겹고 격조 있는 ‘밤 문화’를 즐길 수 있는 곳이 많다. 각 지역의 대표 문화재가 축제의 장이자 공연예술의 무대로, 또 은은한 정취를 즐길 수 있는 공간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궁궐 야간 관람은 최고의 문화상품 중 하나로 자리를 잡았고, 지방의 문화재 야행은 3년 만에 수백만명의 시민을 불러모았다.
◆격조 있는 밤문화, 어둠 속 문화재 체험

밤은 대체로 문화재에 위험한 시간이다. 훼손, 도난 등의 여지가 커지기 때문이다. 야간에 문화재는 닫혀 있어야 한다는 게 일반적인 인식이고, 실제 그렇다. 그러나 문화재 활용에 대한 요구, 특히 일과를 마친 저녁에 여유롭게 즐길 수 있는 문화에 대한 욕구가 두드러졌다. 문화재를 활용한 관광자원의 개발이란 경제적 요인까지 작동하며 밤에 즐기는 문화재는 크게 늘었다.
문화재 야행의 대표는 단연 궁궐이다. 그중에서도 창덕궁 달빛기행의 존재감이 가장 크다. 2010년 시작된 달빛기행은 돈화문→인정전→낙선재→후원 등으로 이어진 동선을 따라 산책하듯 걸으며 밤의 궁궐 경관을 감상하고, 관련 역사를 듣는 프로그램이다. 티켓이 수분 만에 매진될 정도로 인기를 끌면서 문화재청은 운영 횟수와 참가 인원을 늘려왔다. 이제는 경복궁, 덕수궁, 창경궁도 특별 개방을 하거나 각종 공연을 하고 있다. 정재숙 문화재청장은 지난달 열린 국정감사에서 “내년부터 창경궁을 1년 내내 밤 9시까지 개방하겠다”는 방침을 밝히기도 했다.
2016년부터 시작된 각 지방의 문화재 야행도 빼놓을 수 없다. 야간에 특화된 문화체험 제공, 문화유산을 매개로 한 지역경제 활성화 등을 목표로 내세운 야행은 첫해에 10개 시·도 10개 사업(예산 60억원)으로 시작해 매년 규모를 늘려 내년에는 100억원을 투입해 15개 시도에서 27개 사업을 실시한다. 3년간(2016∼18년) 참여 인원은 560만여명이다. 목포시 관계자는 “야행이 열린 지역이 구도심이라 주민이 적고 고령화되어 있는데 오랜만에 사람냄새가 난다며 긍정적인 반응”이라고 전했다.
지난달 28일 열린 창덕궁 달빛기행 참가자들이 청사초롱을 들고 어둠속에서 불을 밝힌 창덕궁의 인정전 월대에 오르고 있다.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기업 대형 간판의 불이 꺼진 이유는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힌 문화재는 그것만의 특별한 매력이 있다. 우선, 상당히 저변이 넓어졌다고는 하나 밤의 문화재 체험은 여전히 희소성이 크다. 문화재 보호를 위해 횟수, 관람 인원을 제한하는 경우가 많이 참여한 자체로 신선한 느낌을 갖게 한다.

또 낮에는 포착하기 힘들거나 볼 수 없는 어둠 속 문화재 특유의 풍경이 있다. 궁궐 야경에서 이런 점이 두드러진다. 조명을 받아 수면에 뚜렷하게 비친 경복궁 경회루, 창덕궁 주합루는 궁궐 야행의 절정이다. 밤에 더욱 선명해지는 건물 지붕의 선과 문창살은 독특한 볼거리다. 창덕궁 해설사 김유정씨는 “지붕선의 실루엣이 선명해져 낮과는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전각이나 회랑에 따뜻한 오렌지색의 불을 밝혀 두어 누군가 그곳에 살고 있다는 느낌도 들게 한다. 아름답고 웅장하기는 하나 사람 냄새를 맡기는 힘든 낮의 전각과는 확연히 차이나는 정서다.
경복궁 별빛야행을 찾은 시민들이 경회루의 야경을 즐기고 있다.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궁궐에서 바라보는 서울 야경은 다른 곳에서 보는 것보다 한결 고즈넉하다. 이런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약간 ‘관리’도 한다. 창덕궁 낙선재 후원에서는 대학로 일대 야경이 눈에 들어오는데, 달빛기행이 열릴 때는 이곳에 있는 한 기업 대형간판 불이 꺼진다. 야경 관리를 위해 기업 측에서 협조를 한 것이다.

야간의 문화재는 각종 공연의 격조 있는 무대가 되기도 한다. 긴 시간이 만들어낸 품격으로 문화재는 조금의 손길만 더하면 근사한 무대로 바뀐다. 얼마 전까지 궁궐 공연프로그램을 연출, 기획한 한국문화재재단 박성호 팀장은 “문화재 자체가 아름다운 하드웨어인 데다 단청의 색감, 문창살이나 처마선의 디자인 등이 어우러져 더할 나위 없는 무대로 활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국립민속박물관 기량 과장은 “주변 경관과 건물 등 전체 모습을 보는 낮과는 달리 밤에는 집중된 감각으로 조명을 비춘 문화재를 감상하기 때문에 다른 느낌을 가진다”며 “정제된 공연까지 더해지다 보니 야간의 문화재가 즐거운 볼거리가 되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문화재 없는’ 문화재 야행, “질적 변화 고민해야”

목포 근대역사관의 음악회에는 100명 정도의 관객으로 성황을 이뤘다. 그러나 19세기 말 시작된 개항과 일제강점기의 저항과 발전 등 목포의 근대사를 다룬 역사관으로 들어가 전시회를 관람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다. 다른 거점인 목포진역사공원에는 의젓한 전통 건축물이 불을 밝히고 있었으나 관람객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가장 북적이는 곳은 노점이 줄지어 선 플리마켓 거리, 입맛을 자극하는 푸드트럭거리였다. 문화재를 매개로 한 축제이지만 문화재는 공연의 배경 정도로 머물거나 아예 존재감이 희미해 보이기도 했다.
지난달 26일 열린 목포 문화재 야행을 찾은 시민과 관광객들로 거리가 북적이고 있다.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야간의 문화재 활용이 이제 질적 변화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라는 의견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문제는 목포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어서 문화재 야행과 야간 개방이 문화재와 별 관련이 없는 축제로 치러지고 있다는 지적은 적잖이 제기됐다. 노점상이나 푸드트럭이 없는 문화재 야행은 거의 없다. 문화재와 상관없는 생뚱한 공연이 펼쳐지는 것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잘되는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면 여기저기서 따라하다 보니 차별성이 사라지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한국문화재정책연구원 채경진 팀장은 “좋은 평가를 받는 문화재 야행은 행사의 취지를 제대로 살리려는 의지가 보이고, 그것을 실제로 표현한다”며 “문화재를 한 번 보고 가는데 머물지 않고 그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데까지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제 기획력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제안했다.

목포=글·사진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