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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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원전 속도 내던 대만, 에너지 대계 결정 '갈림길' [세계는 지금]

원전 정책 놓고 각국 기싸움 팽팽 / 차이 총통, 2016년 대선에서 탈원전 공약 / ‘2025년까지 모든 원전 폐쇄’ 법안 통과 / 24일 국민투표 앞두고 반대 여론 확산 / 화력발전 확대로 인한 대기오염도 쟁점 /佛 환경장관, 원전 감축 후퇴에 반발 사의 / 스위스, 국민투표로 원전 5기 가동 중단 /“英 원전 건설 정당” 판결 두고 유럽 양분 / 폭발사고 당사자 日, 신·증설 허용 분위기
“2025년까지 원전 없는 나라를 만들겠다.”

시작은 호기로웠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은 2016년 대선에서 탈원전 공약을 전면에 내세웠다. 차이 총통이 원전 건설에 찬성하는 국민당 정권을 상대로 싸워 정권교체에 성공한 이후, 대만 입법원(국회)은 지난해 1월 ‘2025년까지 모든 원전의 가동을 완전히 중단한다’는 조항을 포함하는 전기사업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2025년까지 화력발전(80%)과 신재생에너지(20%)를 대체에너지원으로 활용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2년이 지났다. 이제 대만은 탈원전 정책의 폐기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를 앞두고 있다. 대만 시민운동가 황스슈 등이 주도해 탈원전 국민투표를 요구하는 국민청원 운동이 벌어졌고, 필요한 유효 서명 수(28만1745명)를 넘기며 투표가 성사됐다. 오는 24일 지방선거와 함께 치러지는 국민투표는 탈원전 폐지 여부를 포함해 총 10개 안에 대해 실시된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세계적 대세와 함께 탈원전 정책을 강력히 밀어붙였던 대만이 다시 국가 에너지 대계의 방향을 결정하기 위한 갈림길에 서게 됐다.
◆후쿠시마 이후 내리막길 걷는 원전산업

세계적으로 원전산업은 뚜렷한 하향세다. 일본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원전 투자액이 전년도보다 절반 가까이 줄었다고 지난달 11일 보도했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 원전 투자액은 170억달러(약 19조1800억원)로 2016년보다 45% 급감했다. 원전 투자액 중에서도 원전 신설 투자액이 지난해보다 70%나 감소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탈원전으로 정책을 바꾼 국가가 늘어나면서 원전 투자액이 줄어들었다는 분석이다.

독일은 2022년까지 탈원전 하기로 결정했고, 프랑스도 원전 의존도를 70%에서 50%까지 낮춘다는 목표를 갖고 있다. 스위스는 지난해 5월 국민투표를 통해 원전 5기의 가동을 멈추고 대체에너지 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탈핵을 두고 오랜 기간 공방을 이어온 대만도 대세를 따랐다. 차이 총통은 대선 공약을 지키기 위해 취임 당시 2025년까지 대만 내 모든 원전의 원자로 6기를 폐쇄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2016년 화력 82%(석탄 45.4%, 액화천연가스 32.4%, 석유 4.2%), 원자력 12%, 신재생에너지 4.8%, 양수발전 1.2%인 에너지 생산 구조를 2025년까지 화력 80%(액화천연가스 50%, 석탄 30%), 신재생에너지 20%로 바꾼다는 계획을 내놓았다.

대만은 지난 7월4일부터 제4원전 핵연료봉의 미국 수송도 시작했다. 제4원전은 1999년 착공됐으나 탈핵 열풍에 휩쓸려 2014년 공정률 98%로 완공 직전 상태에서 잠정 폐쇄된 곳이다. 대만전력공사는 2020년까지 3년간 8차례에 걸쳐 제4원전 핵연료봉 1744개를 모두 수송할 계획이다.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사고 7주년을 맞은 지난 3월11일 대만 반핵 시민단체 소속 회원들이 타이베이 총통실 앞에 모여 탈핵을 요구하는 플래카드와 팻말을 들고 가두시위를 벌이는 모습.
타이베이=AFP연합뉴스
◆대만 전력난으로 원전 재가동, 돌아선 여론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정부가 본격적인 탈핵 정책을 펼치며 반발 여론은 커졌다. 대만인 10명 중 5명 이상이 전기료 인상을 우려해 탈원전 정책에 반대한다는 조사결과가 나왔다. 지난해 6월 대만 중국시보에 따르면 대만 제1 야당인 국민당의 싱크탱크인 국가정책연구재단이 성인 남녀 1070명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52.6%가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으로 더 높은 전기요금을 내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더 높은 전기요금을 내더라도 괜찮다며 원전 폐기를 지지한 응답자는 42.3%에 그쳤다. 탈원전 정책에 따라 나타날 수 있는 전력난에 대해 참을 수 있다는 응답(48.5%)과 없다는 응답(46.5%)이 비등한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53.9%는 모든 원전의 가동을 중단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았고, 33.0%는 전력 부족의 위험이 있더라도 원전 폐기에 동의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전력난 문제도 겹쳤다. 지난해 8월에는 대만에 50년 만에 태풍이 잇따라 상륙하며 송전탑이 쓰러져 전력 수급문제가 발생했다. 대만 연합보에 따르면 송전탑 붕괴로 130만㎾의 전력수급 문제가 발생하자 정부는 전력 사용량을 줄이는 방안을 제시했고 일각에서는 중단된 원전을 재가동하자고 주장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같은 달 15일 폭염 속에 예고 없이 전력 공급이 중단되면서 대만 3분의 2에 이르는 가구가 대정전 사태를 겪었다. 화력발전소의 고장으로 전력 공급이 차질을 빚자 대만전력공사가 순차 전력 공급 제한 조치에 나서며 대만 전역 828만가구가 영향을 받은 것이다. 리스광 경제부장(장관)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지만, 차잉 총통은 탈원전 정책의 포기는 없다고 선을 그었다. 그러나 올해 여름에도 전력난이 예상되자 결국 중단됐던 원전 2기의 재가동을 결정하는 등 대만 정부는 한발 물러선 태도를 보였다.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국민당 계열의 대만 사회단체 창펑재단은 기자회견을 열어 LNG기지 건설 지연과 재생에너지 발전기술 부족, 안전 확보 우려, 전기료 원가 상승, 이산화탄소 과다 배출 등의 난제로 2025년까지 모든 원전을 폐쇄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전력 공급 제한이나 전기료 인상, 대기오염이 없을 것이라고 했던 차이 총통의 3대 선거공약이 모두 공수표로 돌아갔다고 비난했다.

핵발전소를 화석연료로 대체한다는 대만의 계획과 관련해 대기오염으로 인한 사망 위험을 증가시켜왔다는 기후환경 과학자들의 경고도 이어지고 있다. 예일대가 발표한 국제 연구에 따르면 대만은 이미 안전하지 못한 수준의 대기오염에 노출된 시민의 비율 면에서 10대 최악 국가 중 하나라는 것이다.

미 환경운동가 마이클 셸런버거가 지난달 24일 포브스에 기고한 글에 따르면 대만이 원자로를 대체하기 위해서는 제안된 규모 중 가장 큰 크기로 617개의 태양열 농장을 설립할 필요가 있다고 과학자들은 지적했다. 배터리나 토지 비용을 제외한 예상 비용만 710억달러(약 80조1400억원)다.

◆탈원전 국가들에서 터져 나오는 갈등

탈원전으로 발생한 갈등이 불거져 나오는 것은 비단 대만뿐만이 아니다. 환경운동가 출신 니콜라 윌로 프랑스 환경장관은 원전 감축 목표가 후퇴한 것에 반발해 지난 8월 사의를 표명했다. 프랑스는 프랑수아 올랑드 전 대통령 재임 당시인 지난 2015년 전력 생산 중 원전이 차지하는 비중을 현재의 75%에서 2025년까지 50%로 줄이겠다는 목표를 정했으나, 마크롱 대통령은 이런 일정을 2035년까지 잠정 미루기로 한 게 문제가 됐다. 온실가스 감축을 위해서는 화석연료 사용을 줄이는 게 급선무인데, 이를 위해서는 원전 감축 일정을 뒤로 미룰 수밖에 없다는 게 마크롱 대통령의 주장이다.

탈원전 문제는 국가 간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AFP통신에 따르면 유럽 내에서 반원전 정책을 주도하고 있는 오스트리아는 영국의 원전 건설이 정당하다고 판단한 유럽연합(EU) 법원 결정에 지난 9월 항소를 결정했다. 오스트리아가 제기한 소송에는 룩셈부르크와 반원전 활동가들이 동참했다. 반면 체코, 프랑스,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등은 영국의 원전 건설을 지지했다.

원전 폭발 사고의 당사자인 일본에서도 이러한 분위기는 감지된다. 도쿄신문 등에 따르면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 5월16일 발표한 ‘제5차 에너지 기본계획’의 수정안 초안에 원자력에 대해 “중요한 베이스 로드(Base load·기간) 전력원”이라고 명기했다. 또한 2030년 전력량 중 원자력이 차지하는 비중의 목표치를 이전과 같은 20∼22%로 정했다. 에너지 기본계획은 2030년을 목표 시점으로 한 중장기 에너지 정책을 담은 것으로, 3∼4년마다 개정된다. 이러한 목표치는 사실상 원전 신·증설을 허용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설정한 것으로 해석됐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는 원전 사고지역인 후쿠시마현을 제외한 타 지역 원전 재가동 승인도 이어지고 있다.

누구라도 자신의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곁에 두고 싶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탈원전 문제에 대해선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원자력에는 분명한 장단점이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있을 대만의 탈원전 국민투표에 세계의 이목이 쏠릴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임국정 기자 24hour@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