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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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품은 운해…붉은비단 같구나 [여행]

호남의 천년고도 나주 / 전주·나주 합쳐 전라도… 1000년 넘게 걸어온 비단길, 그후 100년의 쇠락… 역사의 부침 속 느릿느릿 더디가는 시간… 바래서 더 좋은 풍광
한창 잘나가던 전성기만 1000년이 넘는다. 넓은 들판에서 생산한 곡식을 기반으로 한 경제력을 토대로 행정은 물론 군사, 문화까지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1000년 넘게 걸어온 비단길이 짓이겨진 것은 한순간이었다. 비단길 끝자락에서 다시 100여년이 흘렀지만, 짓이겨진 비단길은 해진 채 그렇게 시간만 흘렀다. 다른 지역이 그 사이 빠르게 변화한 데 반해 이곳은 아직도 느린 걸음을 걷고 있다.

올해로 이름 붙은 지 1000년이 된 ‘전라도’의 ‘전(全·온전 전)’은 북도의 전주, ‘라(羅·비단 라)’는 남도의 나주에서 따온 말이다. 1000년이 흐르는 동안 전주는 여전히 전북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지만, 전남에서 나주는 저 광주광역시에 의존하는 도시에 불과하다. 지역별 거점도시를 중심으로 개칭한다면 전광도로 불려야만 할 것 같다.

고려 현종 때인 1018년부터 이름 붙은 전라도란 명칭은 중간에 남원의 이름을 딴 전남도나 ‘이인좌의 난’이 일어난 조선 영조 4년(1728) 광주의 이름을 따 전광도로 불린 적이 있지만, 각각 명칭이 사용된 지 10년도 안 돼 나주의 위상에 다시 전라도 돌아왔다.
전남 나주는 1000년간 호남을 대표하는 지역이었지만 구한말부터 쇠락했다. 이맘때 나주영상테마파크 근처의 금강정에서는 일출 무렵 운해가 햇빛을 받아 붉은 비단으로 변하는 풍경을 마주할 수 있다.
◆한순간에 무너진 1000년의 위상

위상이 높았던 나주가 지금처럼 지방 소도시로 전락한 것은 일제강점기를 전후해서다. 전라도 다른 지역에서 승전보를 올리던 동학농민군은 전국 고을 중 세금을 가장 많이 내는 나주 진출을 시도했다. 1894년 동학농민군은 ‘하얀 구름떼’처럼 기치를 올리며 나주 읍성의 4대문 중 서쪽 문인 서성문을 수차례 공격했다. 관군과 일본군의 수성에 가로막혀 수천명의 사상자만 남긴 채 흩어졌다. 녹두장군 전봉준도 그해 12월 붙잡혔다.

이때 동학군을 막아낸 수성군을 진두지휘한 인물들이 나주 향리들이었다. 독자적 자치조직과 확고한 경제적 기반이 있던 지방관리 향리들이 나서서 나주를 지켰다. 다른 지역보다 부유한 나주 지역 향리들의 위상은 더 커졌다. 공로를 인정받아 나주 향리 중 대부격인 호장 정석진은 해남군수로 제수받았다. 하지만 여기까지였다.

다음 해 시행된 단발령에 반발해 정석진을 비롯한 지역 향리들은 일제에 부역하며 단발을 강제한 부관찰사 등을 처단하고 을미의병을 일으켰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맞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는데 호남에선 나주가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그러나 이들 의병은 관군에 진압됐다.

동학군에 맞서 나주를 수성했던 정석진은 동학군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나주의 전라우영에서 1896년 참수당했다. 동학군에 맞섰던 정석진은 의병을 일으켜 항일운동을 한 공로로 201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됐다. 혼란의 시대를 살던 인물이 겪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나주 근현대사에 있어 난파 정석진이란 인물과 나주는 궤를 같이한다. 정석진이 일으킨 나주의병은 일제에 의해 민란으로 규정됐고, 1896년 나주의 관찰부는 광주로 이전된다. 이때부터 나주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되고, 전남의 중심지는 광주가 된다.

근현대사 혼란의 시기 부침의 흔적은 나주읍성 내에 남아 있다. 다른 지역의 성벽이 둘러쳐진 읍성을 생각하면 안 된다. 성벽으로 둘러싸인 모습은 없다. 성벽은 일제 때 나주 개발 명목으로 해체돼 가옥의 주춧돌, 기둥 등으로 쓰여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 한양 도성처럼 동서남북 사방으로 복원된 남고문, 동점문, 서성문, 북망문이 서 있을 뿐이다. 부지가 넓어 다른 읍성처럼 사대문을 한 바퀴 돌아보기는 쉽지 않다. 나주가 작은 한양인 ‘소경’으로 불릴 정도로 큰 지역이었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다. 실제 읍성의 둘레는 3.5㎞, 성벽의 너비는 6m, 면적은 97만3000여㎡에 달했다고 한다. 경기 수원 화성의 면적은 37만1000여㎡다.
나주 금성관은 왕을 상징하는 지방궁궐이자 객사로 사용됐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한양을 향해 예(망궐례)를 올렸다.
읍성의 중심이 되는 건물은 금성관이다. 나주의 옛 이름이 금성(錦城)이었는데 역시 비단이란 뜻을 품고 있다. 왕을 상징하는 지방궁궐이자 객사로 사용된 금성관은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한양을 향해 예(망궐례)를 올렸다고 한다. 경복궁처럼 금성관에 가려면 삼문을 거쳐야 한다. 외삼문, 중삼문은 있지만, 내삼문은 터만 남아 있다. 가운데 금성관을 중심으로 양편으로는 관리들이 묶던 객사 건물이 붙어 있다. 일제 때 지방궁궐은 청사로 사용되다가 1976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됐다. 외삼문이자 2층 누각인 망화루에서 내려다보는 금성관 처마끝과 나주의 진산 금성산 자락이 이어져 있는 듯한 풍광이 제법 운치 있다.
나주목사의 살림집 목사내아에서는 학봉 김성일과 유석증 목사의 이름을 딴 방에서 잠을 청할 수 있다.
망화루 서쪽 동헌의 출입문 ‘정수루’ 2층엔 ‘신문고’ 역할을 하는 북이 있다. 원위치는 알 수 없지만, ‘원통한 일을 말하고 싶을 때 치라’고 북을 설치한 나주목사 학봉 김성일을 기려 설치했다. 정수루를 지나 보이는 목사의 살림집 목사내아 금학헌에서는 숙박을 할 수 있다. 김성일과 나주 백성들이 상소를 올려 나주에 두 번이나 부임했던 유석증 목사의 이름을 딴 방에서 잠을 청할 수 있다.

동학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인 서성문을 지나면 나주향교가 나온다.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와 격식을 갖춘 향교다. 성균관이 임진왜란으로 소실됐을 때 이 건물을 참조했다고 한다.

비단길을 걷던 나주의 과거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이 향교까지라면, 향교 돌담 너머에선 독특한 형태의 근대 건축물을 만날 수 있다. 나주향교와 담장 기준으로 수백년의 시간이 공존하는 셈이다.
나주 목서원은 구들장 난방을 하는 한옥을 기반으로, 지붕과 창문구조는 일식, 왼쪽 사랑채는 삼각창과 육각창 등 아름다운 서양식을 접목한 가옥이다.
나주 근대사를 대표하는 인물 중 한 명인 난파 정석진의 손자가 1939년 지은 독특한 가옥이 눈에 들어온다. 마당 가운데 100년 된 나무 금목서, 은목서가 있고, 200년 된 회화나무와 느티나무 연리목이 한 켠을 지키고 있다. 이 가옥은 구들장 난방을 하는 한옥을 기반으로, 지붕과 창문 구조는 일본식, 왼쪽 사랑채는 삼각창과 육각창 등 아름다운 서양식을 접목했다. 당시 전남의 유일한 건축가였던 박영만이 건축했다.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로 건축학적 가치도 크다. 당시로는 파격 그 자체였을 것이다. 30년 동안 방치됐던 이 공간을 지난해 남우진씨가 복원해 숙박, 공연, 전시 등을 체험할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 ‘3917마중’으로 변모시켰다. 마땅한 가옥의 이름이 없어 마당에 있는 목서나무에서 이름을 따와 ‘목서원’으로 명했다.
목서원 카페 풍경.
80년 된 쌀창고를 보수한 목서원 카페에서는 창밖으로 나주향교 풍광을 만날 수 있다.

80년 된 쌀창고를 보수한 카페에서는 창밖으로 살아 있는 수백년 전 풍광 한 컷을 마주할 수 있다. 돌담과 그 너머의 나주향교다. 목서원 돌계단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한옥 난파정이 있다. 정석진이 쓰던 정자를 아들이 아버지를 추모하는 제당으로 바꾼 것이다. 한옥 숙소로 사용되고 있다. 난파정에서는 나주향교를 비롯해 읍성을 내려다볼 수 있어 옛 정취를 한껏 느낄 수 있다.
느러지 전망대에서는 영산강의 물돌이를 볼 수 있다. 느러지란 이름은 영산강이 흐르면서 모래가 쌓여 길게 늘어진 지형에서 따왔다.

◆영산강이 그리는 풍경과 먹거리

나주 곡창지대를 이루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영산강이다. 영산강을 접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동강면 옥정리 느러지 전망대에서 영산강의 물돌이를 볼 수 있는데, 일몰 때가 분위기 있다. 느러지란 말은 영산강이 흐르면서 모래가 쌓여 길게 늘어진 지형에서 따왔다. 전망대 앞까지 차가 가지만 길이 좁다. 공산면 신봉리 금강정은 일출 때가 제격이다. 나주영상테마파크 인근 작은 정자인 금강정에서 오른편으로 난 가파른 산길을 10분 정도 오르면 탁 트인 풍경이 나온다. 이맘때는 운해가 심해 강줄기가 잘 안 보일 수 있다. 하지만 흰 운해가 햇빛을 받아 붉은 비단으로 변하는 풍경이 마음을 더 쿵쾅거리게 한다.
영산강 지류인 지석강을 나주에선 ‘드들강’이라 부른다. 작은 강이지만 솔밭유원지와 강 건너편 가을풍경 등이 잘 어우러져 있다.

영산강 지류인 지석강을 나주에선 ‘드들강’이라 부른다. 작은 강이지만 솔밭유원지와 강 건너편 가을 풍경 등이 적당히 어우러져 있다. 찾는 이가 많지 않아 고즈넉한 분위기를 뿜어낸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남평 은행나무길과 전남 산림자원연구소의 메타세쿼이아길에서는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가을의 끝자락을 즐길 수 있다.
나주의 홍어 삼합.

나주를 대표하는 음식 홍어 역시 영산강과 관련 있다. 고려시대 신안의 흑산도 옆 영산도 주민들이 왜적의 노략질로 피해를 입자, 섬 주민을 나주 영산포로 강제이주시키는 공도 정책을 폈다. 고기잡이를 하던 이들은 육지에 정착했어도 흑산도 근처까지 황포돛배를 타고 가서 고기잡이를 했고, 보름 정도 지나 영산강으로 돌아왔다. 그 사이 다른 고기들은 썩지만, 홍어만은 암모니아를 내뿜어 적당히 발효된 상태를 유지했다. 이때부터 ‘삭힌 홍어’를 먹기 시작했다고 한다. 먹을 것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먹었던 것이 별미가 됐다.
국내산 홍어(오른쪽)는 냉동한 수입산과 달리 살집이 더 크다.

서울에서 나오는 삭힌 홍어는 명함도 못 내민다. 냉장 국내산과 냉동 수입산을 20일 정도 숙성해 쓴다. 메뉴부터 국내와 수입은 구분돼 있다. 냉장한 국내산은 냉동한 수입산과 달리 회를 뜨면 부풀어 올라 살집이 크다. 식감은 꼬들꼬들과 푸석푸석함에서 차이가 극명하게 나타난다. 영산포 홍어 등 가게들이 모여 있는 홍어거리에 들어서는 순간 코가 움찔움찔 반응을 시작한다.

나주=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