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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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메모 읽는 의원들을 위한 변명

정부 부처에서 국회로 파견 나와있는 협력관들은 상임위원회 전체회의라도 열릴라 치면 전날 밤 의원회관에서 밤을 새우기 일쑤다. 다음날 국회의원이 전체회의에서 무슨 말을 할지, 장관과 청장을 상대로 무슨 질의를 할지 ‘말씀자료’를 미리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밤새 그런 말씀자료를 의원실 비서들이 써 만들면 깊게 고개를 숙인 협력관이 그 자료를 받아들어 정부로 간다. 거기서 공무원들은 ‘머리를 싸매고’ 고위공직자들의 예상 답변을 만든다. 다음 날 국회의원들이 ‘머리를 처박고’ 그 말씀자료들을 읽으면 고위공직자들도 탁자 위에 놓인 ‘대응 답변’을 힐끔거리며 답변한다. 국회를 출입하면서 숱하게 봐온 장면들이다. 올해 국정감사 때도, 대정부질의 때도 예외는 아니었다.

왜 이런 ‘짜고 치는 고스톱’이 벌어지는 걸까. 쉽게 떠오르는 건 의원들의 역량 부족이다. 10년 이상 국회에서 일한 한 보좌관은 “우리나라 국회의원 중에서 자기 말을 자기가 써서 읽는 사람은 한두 명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의원들의 전문성이 떨어지다보니 보좌진에게 기대게 되고, 결국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질의하는 풍경이 연출된다. 자유한국당 이은재 의원의 ‘MS 발언’은 말씀자료를 그대로 읽다가 벌어졌다. 이번 국정감사에서도 더불어민주당 손혜원 의원이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아시안게임 야구 국가대표 우승을 폠훼하는 듯한 질의를 했다가 누리꾼들로부터 ‘뭇매’를 맞았다.

이도형 정치부 기자
의원 전문성을 높이면 이런 문화가 사라질까. 솔직히 고개는 갸웃거린다. 의원 개개인의 역량 문제 이상 ‘현실의 벽’이 가로막혀있다. 우선 상임위 질의에 집중하기 어려운 의원 일정이 꼽힌다. 자유한국당의 한 3선 중진 의원은 지난 12일 하루 동안 11개 일정을 소화했다. 잠을 자고 이동하고 밥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매 시간마다 일정을 소화한 셈이다. 그 의원실 관계자는 “의원에게 보고하려고 만든 자료가 시간이 지나서 폐기하는 경우만 산더미”라고 푸념했다. 그런 상황에서 상임위 이슈를 제대로 챙길 여유가 있을까. 일정 중 대부분은 지역구나 각종 행사에서 부르는 ‘의전용 일정’이다. 행사에 앉아서 손 한번 흔들고 인사 한번 하면 한두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간다.

비효율적인 질의 관례도 문제다. 상임위에서 의원 한 명당 배분되는 질의시간은 7분 정도다. 그 안에 질문은 물론 정부 부처 사람들의 답변도 받아내야 한다. 의원들이 툭하면 ‘시간 없어요’ ‘묻는 말에 대답이나 하세요’라고 윽박지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7분 안에 기승전결을 만들어내야 하니 ‘짜고 치는 고스톱’이 벌어지는 것이고, 협력관들과 비서진은 의미 없는 말씀자료들을 주고받는다.

의원 일정을 줄이는 게 어렵고, 전문성도 당장 끌어올리기 어렵다면 현행 상임위 위주인 국회 회의를 소위원회 위주로 바꾸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다. 소위에 참석하는 의원이 많아야 10명을 넘지 않기 때문에 의원당 질의시간은 많아지고, 의원과 정부 간 진검승부가 가능하다. 국회가 국민 불신을 개선하려면 의정활동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고쳐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이도형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