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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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현해탄 건너 ‘단풍연가’

늦가을愛 일본 닛코 / 평화 꿈꾸던 에도시대…조선통신사 발자취 좇다
발을 내딛는 것만으로도 조심스러워진다. 경계를 넘는다는 것이 부담으로 다가온다. 이런 부담을 떨쳐내고 싶지만, 어쩔 수 없다. 다른 나라에서 그들의 선조를 기리는 곳을 찾는다면 그러려니 받아들이지만, 이곳에선 쉽지 않다. 그저 여행으로 부담 없이 오는 거니, 이런 불편함을 떨쳐내도 될 듯한데 한국인이기에 마음 한구석이 괜스레 무거워진다. 동네 곳곳의 이름 없는 신사라면 쓱 한 번 둘러보고 나오겠지만, 그런 곳이 아니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초등학생들이다. 학교별로 같은 색 모자를 눌러 쓴 아이들이 우르르 단체로 깃발 든 선생님을 따라다닌다. 모자 색깔로 일행 여부가 바로 구분된다.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아이들 뒤로 나이 지긋한 어른들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긴다. 신사 안은 어느새 인파로 북적인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는다. 일본 현지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찾는, 찾고 싶어하는 곳이다. 각자 찾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근저에는 ‘평화’란 것이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간직한 역사에서도, 품고 있는 풍광에서도 일본 도치기현의 닛코는 찾는 이에게 안녕과 평화를 선물한다.
일본 닛코 도쇼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과 위패가 있는 신사다. 도쇼구를 둘러보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삼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평화를 꿈꾸는 이들이 찾는 곳

일본 도쿄를 찾는 이는 많지만 기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닛코(日光)는 여행 일정에서 고려의 대상이 안 된다. 도쿄 시내만 둘러보는 데 며칠을 묵어도 모자라는데 외곽의 닛코는 다음에 방문한다면 ‘한 번 가볼까’ 싶은 지역이다. 그리고 잊힌다.
도교에서 닛코까지 운행하는 도부열차.
하지만 도쿄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닛코는 자연스럽게 언급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익숙지 않을 수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잘 모르더라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익숙한 인물이다. 임진왜란을 일으켜 조선에 큰 피해를 끼쳤다. 임진왜란 중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왜적은 이를 핑계로 패색이 짙던 전장에서 철수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척점에 서 있던 인물이 도쿠가와 이에야스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후 권력을 잡아 전투가 끊이지 않던 전국시대 최후의 승자가 된다. 그는 전쟁을 통한 대외 팽창을 노린 도요토미 히데요시와는 다른 통치를 한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던 전국시대 후 260여년간의 평화 시대를 연다. 지방의 한 도시에 불과했던 도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시대가 자리 잡은 후 오사카, 교토를 넘어 일본 정치·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하는 최대의 도시로 성장한다.

지금의 도쿄가 있게 된 기틀을 마련한 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이다. 그와 그의 후손들이 지배하던 시대는 전국시대처럼 하루아침에 목숨이 사라지는 혼란한 상황이 아닌 평화로움이 흐르던 시기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무덤.
평화의 시대를 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 도쇼구(東照宮)가 닛코에 있다. 전국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위패가 있는 신사인 ‘도쇼구’가 많지만, 무덤과 위패가 함께 있는 닛코의 도쇼구가 그 본산이다. 닛코는 그와 직접 관련이 있는 곳은 아니다. 도쿄 남쪽 시즈오카에서 눈을 감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시즈오카에 시신을 묻고 1년 후 닛코에 작은 신사를 세워 이장을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또 ‘닛코에 작은 사원을 짓고 나를 신으로 모셔라. 나는 평화의 수호자가 되리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해가 지지 않는 닛코에 묻어달라고 한 그가 가문의 영속을 위한 평화를 꿈꾼 것인지, 백성들을 위한 평화를 바랐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후대에 이곳이 평화를 상징하는 곳으로 인식되게 한 것만은 틀림없을 듯싶다. 도쇼구를 찾은 현지인들이 평화를 바라며 향을 올리는 모습에서 뚜렷이 나타난다. 군국주의 부활 얘기가 나오는 일본 정치권의 행보와는 분명 다른 길이다.

단순히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이라면 찾을 이유는 많지 않다. 그가 죽은 후 아들은 이장을 했고, 손자는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주기 위해 무덤을 황금과 정교한 조각으로 치장했다. 손자는 전국에서 장인 1만5000명을 불러들여 금 56만냥을 투입해 1636년 지금의 모습을 완성했다. 손자의 신사도 도쇼구 옆에 있다. 이들 신사와 인근의 절집 등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닛코 국립공원 입구에 있는 신교.
도쇼구내 신큐사 외벽의 원숭이 목판화 산자루.
도쇼구에 걸려있는 조선이 선물한 종.
일본 신사를 찾는다는 것이 달갑지 않을 수 있다. 도쇼구는 조선을 침략했던 왜적의 수장이 아닌 평화 관계를 유지했던 수장의 신사라는 점에서 이런 부담을 한결 덜 수 있다. 임진왜란 후 국교회복을 바라는 에도 막부는 조선통신사 파견을 지속적으로 요청한다. 이 청원을 받아들인 조선은 수차례 사절단을 파견하는데 에도(현재 도쿄)를 들른 통신사는 도쇼구에 세 번이나 들렀다.

도쇼구에서는 통신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데, 도쇼구에서 가장 화려한 문 요메이몬(陽名門) 앞에 작은 종이 걸려 있다. 높이가 110㎝, 둘레가 90㎝에 이르는 이 종은 1643년 인조가 제사에 사용하라고 보낸 조선 종이다. 도쇼구 가장 높은데 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 무덤 앞 향로, 화병, 촛대 등 삼구족도 조선통신사의 선물이다.

도쇼구 곳곳의 장식을 보면 일본 특유의 ‘디테일’이 살아있다. 현란한 금박을 입힌 요메이몬은 5000여개의 조각이 새겨져 있다. 마구간 신큐사 외벽의 원숭이 목판화 산자루(三猿)도 눈길을 끈다. 원숭이 세 마리가 각각 눈, 귀, 입을 막고 있는 모습이 양각돼 있다. ‘못 들은 척, 못 본 척하며 말도 함부로 하지 말라’는 일본의 처세술을 상징한다. 처세술의 달인으로 꼽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떠오를 수밖에 없다. 무덤 길 초입에 있는 눈을 감고 있지만 귀는 쫑긋 세운 작은 고양이 ‘네무리네코’와 에도 시대 때 그린 상상의 코끼리 조각 등도 유명하다. 워낙 유명한 신사이기에 제사를 지낼 때 전국에서 술을 보내는데, 다양한 술독이 전시돼 있는 모습도 눈길을 끈다.
도쇼구 인근의 카페 ‘홍구’.
도쇼구를 둘러보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은 삼나무들이 눈에 들어온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무덤 가는 길의 삼나무와 그 길에서 내려다보는 도쇼구 건물들이 삼나무에 둘러싸인 모습이 압권이다. 도쇼구 인근의 카페 ‘홍구’도 운치 있다. 카페 앞 삼나무 풍경을 즐기며 휴식을 즐기기 안성맞춤이다.
일본 닛코 게곤 폭포는 울긋불긋한 단풍을 뚫고 100m 위에서 쏟아져 내린다. 일본에선 ‘닛코를 보기 전에 겟코(멋짐 또는 훌륭함)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이 전해진다.
◆닛코를 보기 전 ‘멋지다’를 말하지 말라

우리 역사도 아닌 일본의 역사, 전통 건물 등만 보려고 이곳을 찾기엔 선뜻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서양인들이야 일본의 처마와 장식을 보며 동양의 새로운 문화를 접하겠지만, 우리는 아니다. 한국의 전통 사찰, 한옥 등 이미 익숙한 모습이어서 도쇼구 등에서 색다른 매력을 느끼긴 쉽지 않다. 닛코의 또 다른 매력은 풍광에 있다. 일본엔 ‘닛코를 보기 전에 겟코(멋짐 또는 훌륭함)라는 말을 하지 말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생전 이 풍경에 매료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닛코로 이장을 원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압도적인 풍경의 근본은 난타이산과 주젠지 호수고, 호수에서 떨어지는 게곤 폭포는 화려함의 극적인 장면을 연출한다. 거기에 가을의 오색찬란함은 화룡점정이다.
닛코의 난타이산.
유람선을 타고 주젠지 호수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주젠지 호수 주위로는 외국 대사관 별장들이 많다.
작은 후지산이라 불리는 난타이산(男體山·해발 2486m)이 폭발해 흘러내린 용암이 물줄기를 막아 주젠지(中禪寺) 호수가 생성됐다. 닛코 지역의 평균 고도가 600m고 주젠지 호수는 산 허리춤인 해발 1270m 부근에 있다. 호수의 규모도 둘레만 25㎞다. 주젠지 호수는 원하는 구간을 트레킹하거나 유람선을 타면서 즐길 수 있다. 한 시간가량 호수 주위를 도는 유람선를 타면 바람이 매섭지만, 풍경을 보기 위해 외부로 나오게 된다. 배 오른편에 서야 호수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호수의 풍경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장면이 낚시하는 이들이다. 강태공이 아니다. 주위 식당에서 생업을 위해 배를 띄워 빙어 낚시를 하고 있다. 잔잔한 호수에 평화로이 떠있는 배들이 그리는 풍경이 오스트리아의 호수마을을 떠오르게 한다. 영국, 이탈리아 등 유럽 지역 대사관들이 이곳에 별장을 세운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유람선을 타고 호수 주변을 돌면 유럽식 건축물이 눈에 들어오는데 대부분 대사관 별장이다. 지금은 닛코시에서 인수해 관광지가 됐다. 트레킹을 한다면 이 대사관들을 이정표 삼아 돌면 된다.
일본 사이타마현 카와고에는 에도 시대의 모습을 간직한 곳으로 중요전통건물 보존지구로 지정돼있다.
고즈넉한 가을과 어울리는 호수 풍광은 게곤 폭포의 웅장함에 고개 숙인다. 울긋불긋한 단풍 사이를 뚫고 100m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위용은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봐도 감탄을 자아낸다. 케이블카를 타고 오르는 아케치다이라 전망대에서 게곤 폭포와 그 위 주젠지 호수, 난타이산 풍광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1930년부터 운영된 엘리베이터를 타고 100m 아래로 내려가 폭포 아래서 풍광을 볼 수도 있다. 독특한 형태의 기암괴석에 둘러싸인 폭포의 우렁찬 낙하는 오감을 자극한다.

닛코=글·사진 이귀전 기자 frei5922@segye.com

여행 tip

○…도쿄에서 닛코까지는 기차로 2시간이면 도착한다. 도쿄 아사쿠사역에서 출발해 도부닛코역에 도착하는 도부철도를 이용하면 편하게 갈 수 있다. ‘닛코 전 지역패스’와 ‘닛코 세계유산 지역패스’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닛코 전 지역패스’는 도쿄까지 왕복 철도는 물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도쇼구 등에 다니는 닛코 지역 내 도부버스 전 노선과 케이블카, 유람선 비용 등이 포함돼 있다. 각각 이용 시보다 40% 저렴하게 즐길 수 있다. ‘닛코 세계유산 지역패스’는 왕복 철도와 세계문화유산을 오가는 도부버스를 이용할 수 있다.

○…닛코에서는 온천을 즐길 수 있고, 대표적인 음식이 유바(두부껍질)다. 절집이 많은 닛코에서 영양이 뛰어난 휴대용 식량으로 시작됐다. 두유를 가열하면 표면에 얇은 막이 생기는데 이 막을 재료로 유바를 만들었다. 겉모습만 보면 넓적한 면처럼 보이는데, 식감은 밀가루면보다 더 쫄깃쫄깃하다.

○…도쿄 이케부쿠로역에서 도부철도를 이용 시 30분이면 에도시대 정취가 남아있는 사이타마현 가와고에에 갈 수 있다. 도쿄는 과거 모습이 거의 사라졌지만, 가와고에에는 일본의 전통가옥 양식 중 하나인 구라즈쿠리식 가옥과 상가들로 이뤄진 에도 거리가 조성돼 있다. 가와고에는 중요전통건물 보존지구로 지정돼 있다. 가와고에에서는 기모노 체험과 장어, 고구마 요리 등을 즐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