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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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 만난 세상] 나의 고시원 체류기

살다 보면 다양한 경험을 하기 마련이지만 고시원에 살게 될 줄은 몰랐다. 이사 날짜가 두 달 남짓 남은 터라 급히 살 방이 필요했다.

‘월 20만원, 식사 제공, 이불 베개 제공.’ 서울에 이렇게 싼 데가 있다니 의심이 들긴 했지만 금세 잊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인생에 한 번쯤 이런 곳에도 살아봐야지’ 하는, 무례하고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고시원에 들어가자마자 ‘실내정숙’이란 커다란 액자 속 글씨가 사람을 압도했다. “방 보여드릴게요”라고 말하는 총무를 따라갔다. 복도 폭은 60㎝ 정도. 여럿이 한꺼번에 지나가려면 기차놀이를 하듯 가야 했다. 행여 큰불이라도 나면 비좁은 복도에서 화를 당하기 쉬운 구조였다.

방에 들어가니 ‘방’보다 ‘관’(棺)이라고 불러야 할 면적의 공간이었다. 겨우 발을 뻗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작은 침대가 먼저 눈에 띄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침대는 매일 밤마다 ‘퉁!’ 하는 소리와 함께 스프링으로 허리를 때릴 정도로 고물이었다. 책상은 침대와 거의 붙어 있다시피 했다. 천장을 가로지르는 두 가닥 노끈은 빨래를 널어 말리는 용도였다.

김범수 사회부 기자
한 달치 월세를 지불하고 좁은 방에 들어앉자 가장 먼저 외로움이 솟구쳤다. 그래서 지인한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누가 방문을 두드렸다. 신경질적인 인상의 학생은 말하기도 귀찮다는 듯 검지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고 돌아갔다. 그제야 옆방에서 방귀를 뀌는 소리가 들릴 만큼 방음이 형편없음을 깨달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소리를 내지 않는 인간이 됐다. 말수도 없어졌다. 사람과 소음이 미치도록 그리웠다.

마침 박근혜정부 국정농단 사태로 서울 도심이 주말마다 촛불로 뒤덮이던 때였다. 그런 날 밤에는 집회 현장만 찾아다녔다. 간혹 고시원에 일찍 돌아갈 때는 어김없이 술을 사 들고 갔다. 술 없이는 견디기 힘들었다.

고시원 한 층에 화장실과 샤워장은 한 곳뿐이라 아침만 되면 전쟁이 났다. 어느 날 반쯤 열려 있던 화장실 문을 잡아당겼는데 큰 용무를 보던 일용직 아저씨와 눈이 마주쳤다. 죄송하다고 말하고 황급히 물러나기가 무섭게 걸쭉한 욕설이 날아들었다. 졸지에 ‘정신질환자’, ‘야만인’ 등이 되고 말았다. 조금은 억울했다. 화장실 문을 열어둔 채 볼일을 보는 것부터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고시원에는 다양한 사람이 있었지만 좁은 공간에 갇힌 모두들 마음의 여유가 없었고 서로에게 무관심했다. 옆방 학생의 울음소리가 벽을 뚫고 들렸을 때도 아무도 관심 갖지 않았다. 결국 두 달을 못 버티고 한 달 만에 고시원을 도망치듯 나왔다. 나는 경기도의 부모님 댁으로라도 갔지만 다른 사람들은 고시원 아니면 마땅히 머물 곳이 없어 보였다. 보증금을 마련할 능력이 있었다면 애초 이런 고시원을 찾지도 않았을 것이다.

얼마 전 서울 도심의 한 고시원에 불이 나 7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비좁고 열악한 고시원에서 지친 몸을 뉘었다가 결국 화마에 변을 당하고 말았다. 이 중 5명은 빈소도 못 차린 채 한 줌의 가루가 돼 다시 컴컴한 납골함 속으로 들어갔다. 이승에서 고단했을 희생자들이 저승에서는 좀 더 넓고 밝은 공간에서 지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김범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