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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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디톡스' 선언한 2030… '소확행' 사교의 장 즐기다 [S 스토리]

비대면 소통 방식에 피로감 쌓여/오프라인서 새로운 만남 방식 추구/편안하고 따뜻한 ‘공간’에서 만나/이름·직업 묻지 않고 관심사 공유/
대부분 시즌제로 회원 유료 모집/수십만원 비용 들어도 사람 몰려
지난 20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젊은이들로 항상 붐비는 이곳 골목에는 주변과 사뭇 어울리지 않는 양옥 한 채가 있다. ‘취향관’이란 문패만 봐선 용도를 알기 어렵다. 야트막한 돌담을 지나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호텔을 연상시키는 컨시어지가 손님을 맞이한다. 컨시어지 옆 테이블과 바에서는 10여명이 책을 읽거나 관심사에 대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이들은 커피나 영화, 철학 등 다양한 주제를 놓고 편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의견을 교환했다.


지난 4월 문을 연 취향관은 서로의 취미나 관심사를 논하는 이른바 ‘살롱’(Salon)이다. 프랑스어로 ‘방’을 뜻하는 살롱은 18세기 지성인과 예술인들이 모여 토론하고 지식을 나누던 공간이었다. 디지털 공론장이 대세인 오늘날 새로운 방식의 소통을 찾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프랑스의 살롱 문화를 접목한 커뮤니티가 주목받고 있다.

◆나이·직업 관계없이 자유롭게 토론

살롱의 핵심은 소통이다. 최근 취미를 공유하거나 새로운 인간관계를 위한 소모임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지만 살롱은 ‘소통’에 좀 더 깊게 파고든다. 취향관에서는 회원들이 서로의 이름이나 나이, 직업 따위를 묻지 않는다. 가입 과정에서 최소한의 개인정보를 요구하지만, 이를 운영에 활용하거나 공개하진 않는다. 단지 서로 관심사나 취미를 공유하고 소통할 수 있도록 환경을 조성해줄 뿐이다. 실제 프랑스에서 신분이나 직위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소통하던 살롱 문화를 그대로 본뜬 것이다.

취향관의 박영훈·고지현 공동대표는 23일 “살롱 자체가 역사적 유물이 될 수 있지만 지금의 살롱이 과거와 다른 형태가 될 수 있다고도 생각한다”며 “우리 주변 사람들의 생각과 감성, 동기를 자극하면 예술적 향미가 우러나올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근 국내에 뿌리 내리고 있는 살롱들은 ‘공간’에 각별한 신경을 쓴 점이 특징이다. 공간이 주는 즐거움이나 편안함이 소통의 깊이를 다르게 해준다고 여겨서다. 실제 취향관에 들어서면 공간이 주는 따듯함 덕분에 낯선 장소나 사람에 대한 경계심이 눈 녹듯 사라진다. 회원들의 소통을 고려한 가구 배치나 동선도 돋보인다.

취향관 2층의 원테이블은 매일 밤 살롱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이곳에서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멤버 살롱’은 회원들이 직접 개설하고 운영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취향관은 회원들의 살롱 운영에 보조 역할을 하지만 프로그램에 개입하거나 주도하지 않는다. 박 대표는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를 보며 과거의 예술가들을 만난다는 환상에서 영감을 받았다”며 “‘우리 시대에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결코 거창한 것이 아니란 걸 취향관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인문학·음악·독서 등 관심사 공유

이런 살롱들은 최근 서울을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다. 철공소와 예술이 공존하는 영등포구 문래동에는 음악과 책, 영화 등 전문 영역을 다루는 살롱들이 생기고 있다. 취향관이 다수의 취향을 고려한 개방적 살롱이라면, 문래동의 살롱들은 비교적 범위를 좁혔다는 점에서 실제 프랑스 살롱과 유사하다.

문래동의 철공소 사이에 위치한 ‘문래당’은 인문예술공유지를 표방한다. 이곳은 인문학 연구자와 작가, 예술가, 기자 등 다양한 직군의 사람들이 주축이 돼 소통하는 공간이다. 문래당 김이소 대표는 “처음에는 박사논문을 마치고 같은 분야 사람들끼리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만들었다”며 “이제는 제각기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토론을 하거나 계획을 세워 활동한다”고 소개했다. 이곳은 프로그램이나 활동비가 정해져 있지 않다. 20∼30명의 회원이 시간 날 때마다 모여 십시일반으로 활동비를 모으고 진행할 프로그램 등을 기획한다.

지난 20일 기자가 찾은 서울 마포구 합정동 ‘취향관’에서 회원들이 커피나 술을 마시며 취미와 관심사 등을 공유하고 있다.
서상배 선임기자
문래동의 또 다른 살롱인 ‘문래문화살롱’은 예술을 공유하고 경험할 수 있는 살롱이다. 겉보기에는 맥주나 와인을 파는 평범한 펍이지만, 저녁이 되면 예술인들의 정취를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 이곳을 관리하는 직원 대다수가 현직 아티스트인 것도 특징이다.

살롱 문화의 한 축을 차지하는 것이 동네서점이다. 책은 살롱의 주요 콘텐츠이자 소통의 도구다. 최근에는 제각기 다른 개성을 지닌 동네서점이 부활하면서 살롱 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제일기획 출신 카피라이터 최인아 대표가 문을 연 ‘최인아책방’이 대표적이다. 이곳에서는 서점이 곧 살롱이다. 서점 3층에 마련된 ‘혼자의 서재’는 사색에 잠겨 책을 읽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독서 공간이라는 점에서 다른 사람과의 소통은 어렵지만, 북클럽 멤버십을 신청하면 매월 진행되는 독서토론에 참여할 수 있다. 서점에서 고른 책 한 권을 읽은 뒤 책의 저자나 출판사 관계자 등과 의견을 나누는 식이다.

동작구의 독립서점 ‘지금의 세상’은 매월 ‘지금의 살롱’이라는 심야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참석자가 현재 고민이나 생각을 신청곡과 함께 쪽지에 적어 내면 서점 주인이 도움이 될 만한 책을 뽑아주는 식이다. 대체로 책에 관심 있거나 조언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대화 분위기가 조성된다.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에 위치한 ‘문래당’은 인문예술공유지를 표방한다.
문래당 제공
◆디지털 디톡스를 위해 살롱 찾아

살롱 문화가 확산하는 이면에는 현대인이 느끼는 대면 소통에 대한 갈증이 있다. 기술 발달로 비대면 방식의 다양한 소통 창구가 등장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소통 부재를 호소하는 목소리도 높다. 일부는 비대면 소통에 따른 피로도가 쌓여 디지털 디톡스(해독)를 하거나, 오프라인에서의 대면 소통에 나서고 있다.

직장이나 회사 등 조직에서 요구하는 정형화된 소통 방식을 힘겨워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들은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소통에서 벗어나 민주적이고 수평적인 소통을 추구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취향관 박영훈 대표는 “살롱 문화는 느슨한 관계 속에서 각자가 자기다움을 찾아가도록 도와주고 있는 것 같다”며 “어떤 목적과 기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나누기 위해 기꺼이 대화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살롱 방문객의 상당수가 새로운 만남이나 상대에 대한 관심보다 깊이 있는 대화를 원한다는 점에서 소통의 합리주의가 엿보인다고도 분석했다. 정덕현 대중문화 평론가는 “인간관계가 가까워서 좋은 점도 있지만 반대로 불편한 점도 있다”며 “살롱 문화는 적당한 거리에서 서로의 관심사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대안적 관계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살롱들은 대부분 시즌제로 회원을 모집한다. 취향관의 경우 3개월 시즌 가입비가 45만원이다. 이 비용을 내면 3개월 동안 취향관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회원을 대상으로 하는 살롱 프로그램에도 참여할 수 있다. 독서커뮤니티인 트레바리는 4개월에 19만∼29만원, 소셜살롱 문토는 3개월에 19만∼29만원이다.

비용을 감수하고도 사람들이 몰리는 건 그만한 가치를 느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문래당 김이소 대표는 “대다수 사람은 직장이나 학교와 같은 좁은 범위에 인간관계가 국한되는데, 살롱에서는 나와 다른 조직이나 성향의 사람들을 만난다는 점에서 만족을 얻는 것 같다”고 전했다.

권구성 기자 ks@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