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미술품 대중적 관심 높여 중저가 시장 키우고파” [차 한잔 나누며]

미술품 공동구매 길 연 ‘열매컴퍼니’ 김재욱 대표/몇 년째 정체된 한국 미술 시장/소비자 유입 위해 공동소유 추진/이윤 아닌 애정으로 뛰어든 사업/
오픈마켓·큐레이팅 등 다변화 중/상위 1%가 아닌 일반 대중들도/그림 즐기고 투자하는 시대 오길
한국 추상화의 선구자 김환기의 ‘산월’(20×27㎝) 4500만원. ‘황소’로 유명한 이중섭의 양면화 ‘무제’(11.5×15.1㎝) 5200만원.

이 작은 그림들을 수천만원을 들여 살 사람이 대한민국에 몇 명이나 될까. 그런데 이를 100만원에 소유할 수 있다면, 비록 소유권을 나눠 갖더라도 얘기는 달라진다.

“저희는 작품관리와 재판매에 따른 수수료를 받지 않고, 투자자들과 함께 리스크를 나눠 지며 공동구매에 참여합니다. 그래서 더 책임감을 갖고 가치 있는 작품을 엄선할 수 있죠. 15∼20%의 수익률을 유지하는 것이 저희 목표입니다.”

지난 10월 국내 처음 시작된 미술품 온라인 공동구매는 두 달 만에 미술품 시장에서 가장 핫한 주제로 떠올랐다. ‘아트앤가이드’의 첫 공동구매 작품 ‘산월’은 오픈 7분 만에 마감됐고, 한 달 만에 5500만원에 되팔렸다. 수익률 22%를 달성한 것이다. 두 번째 공동구매에서 이중섭의 양면화는 3분 만에 투자자 모집이 마감됐다.

‘아트앤가이드’를 운영하는 ‘열매컴퍼니’의 김재욱(37) 대표는 “지난달엔 접속자가 너무 많이 몰려 구매하지 못한 분들의 항의 전화를 온종일 받았다”며 “내년부터는 작품 수를 늘려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작품은 100만∼500만원을 투자한 사람 20여명이 공동 소유하며 소유권은 블록체인 기술로 투명하게 관리한다. 이 시스템을 기획하고 개발하고 구축하기까지 1년 반을 공들였다.

“사실 회사 지분은 10% 안팎에 불과해 작품확인서를 만들어 발급하고 나면 남는 것은 얼마 안 됩니다. 하지만 공동구매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습니다. 미술품에 대한 관심을 넓혀 중저가 미술품 시장이 활성화되기를 기대하고 시작한 일이거든요.”

선뜻 이해되지 않는 말이다. 김 대표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회계사와 펀드매니저로 일하다 간송미술관에서 경험을 쌓은 뒤 지금의 열매컴퍼니를 만들었다. 이력만 봐선 ‘새로운 시장 가능성을 보고 뛰어들었겠거니’ 생각이 든다. 하지만 직접 이야기를 나눠본 그는 시장이 아닌 ‘미술’에 푹 빠진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중·고교 시절에도 쭉 화실에 다닐 수 있도록 부모님이 지원해주셨죠. 하지만 미대 진학은 반대하셔서 경영학을 전공했습니다. 사람 만나고 그림 보러 다니는 걸 좋아하다 보니 남들보다 늦게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재미있게 일했지만 결국 제 마음 가는 쪽으로 움직이게 되더군요.”

미술관 운영팀장으로 이직하면서 월급은 반 토막도 아닌 반의반 토막이 났다. 그래도 너무나 즐거웠다. 좋아하는 그림을 맘껏 즐길 수 있었고, 회계관리와 전시, 새로운 사업 진행 등 미술과 관련된 많은 일을 배웠다. 하지만 일을 할수록 한국 미술 시장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지난 20일 서울 서초구 방배동 ‘열매컴퍼니’ 사무실에서 만난 김재욱 대표는 “거장의 작품을 공동구매하는 것으로 미술품에 대한 대중적 관심을 높여 궁극적으로는 중저가 시장을 확산하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다.
서상배 선임기자
“한국 미술 시장은 4000억원대에서 몇 년째 제자리입니다. 새로운 구매층이 유입되지 않는다는 뜻이죠. 또 현재 등록된 작가는 5만여명, 예비 작가까지 합치면 12만명 정도인데 최근 10년 사이 미술품 거래가 이뤄진 작가는 3000명 정도입니다. 심각하죠. 재능 있는 신진작가들의 작품 판매를 활성화해보려는 생각으로 회사를 만들었고, 새로운 소비자 유입을 위해 ‘거장의 작품을 공동구매’하는 것으로 미끼를 던진 것입니다.”

궁극적인 목적이 ‘중저가 미술품 시장 활성화’인 만큼 김 대표는 다양한 사업을 준비 중이다. 내년 3월 작가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해주는 온라인 오픈마켓 서비스를 시작할 예정이다. 가격에 대한 의심을 없애기 위해 인공지능을 통해 미술품 가격을 책정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작품을 분석하고 소비자에게 맞게 추천하는 큐레이팅 프로그램도 개발 중이다. 모두 미술을 잘 모르는 사람도 취향껏 즐기는 문화를 만들기 위함이라고 김 대표는 강조했다.

“상위 1%가 아닌, 되도록 많은 사람이 ‘미술품이 투자 가치가 있고, 집에 걸어놓을 필요가 있다’는 걸 알고 경험했으면 좋겠습니다. 꼭 크고 비싼 것이 아니더라도 마음이 끌리는 그림을 사서 집에 걸어보세요. 생각보다 많은 것이 바뀐답니다.”

김희원 기자 azahoit@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