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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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대화가 필요해

“너 혹시 탈코니?”

송년회를 겸해 오랜만에 만난 대학 친구들 사이에서 뜻밖에 ‘탈코르셋’ 오해가 벌어졌다. 탈코르셋은 남의 시선을 의식해 화장, 옷차림 등을 억지로 꾸미지 말자고 주장하는 사회적 운동이다. 평소 단발이던 A가 쇼트커트로 머리 스타일을 바꾼 채 등장했다. 친구 B가 A에게 탈코르셋이냐고 물어보자 순간 속으로 ‘물어봐도 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어 뜨끔했다. 남녀혐오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하면서 페미니즘과 혜화역 시위 등 성별에 따라 입장이 갈리기 쉬운 이슈가 나오면서 대화 분위기가 서먹해진 적이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창훈 사회2부 기자

“남자친구랑 헤어졌어.” 잠깐 흐른 어색한 정적은 A의 답변과 함께 사라졌고 친구들은 위로를 겸해서 A의 ‘솔로 부대’ 재입대를 축하(?)했다. A는 “주말에 머리 새로 꾸미고 월요일에 회사에 출근했는데 다들 내 머리 스타일 보더니 ‘탈코르셋 운동하냐’고 물어보더라”며 “속눈썹 없이는 외출도 안 하는데 무슨 탈코르셋이냐”고 웃어넘겼다.

머리카락을 갑자기 자르는 행위는 보통 실연을 의미한다. 이유는 모른다. 혹자는 사랑의 신경 전달 역할을 담당하는 ‘페닐에틸아민’(Phenylethylamine)이라는 호르몬과 관련돼 있다고 설명한다. 실연 후에는 단백질이 풍부한 페닐에틸아민이 필요 없어지면서 단백질 성분으로 이뤄진 머리카락을 잘라낸다는 것이다. 그러나 올해 우리 사회를 흔들었던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이후 여성성을 강요하는 움직임에 반해 시작된 탈코르셋 운동은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는 행위의 해석마저 바꾸었다. 그렇게 바뀐 여성의 머리 스타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조차 남성의 입장에서는 조심스러워졌다.

하지만 너무 조심했을까. 최근에는 성별에 따라 입장이 갈리기 쉬운 혜화역 시위, 이수역 폭행과 같은 젠더 이슈를 남녀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이야기하는 것이 불편한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남성이 이해하지 못하는 여성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지만 몇몇이 들려준 강경한 입장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남성들 또한 남성을 조롱하고 혐오하는 반응에 분노하며 젠더 문제에서 강경한 입장으로 변해갔다. 한 설문조사에서 우리 사회의 혐오현상 중 남녀갈등이 가장 심각한 문제라는 데 최다 공감을 받은 사실은 남녀 간에 이미 높은 벽이 자리 잡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화여대 김선희 교수(철학과)는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여성혐오에 저항하는 여성 수십명을 인터뷰해 책 ‘혐오 미러링-여성주의 전략으로 가능한가?’를 발간했다. 김 교수는 “여성혐오에 대한 미러링 전략이 오히려 여성의 자기혐오로 귀결되고 남녀의 균열과 대립을 초래한 부분이 있다”며 “미투 운동 이후 보여준 여성의 연대를 여성주의 가치를 실천하고 달성하기 위한 긍정적 에너지로 바꾸는 것이 우리 사회의 과제”라고 분석했다.

남혐과 여혐이 극단으로 치닫는 가운데 여성이 말하는 여성해방과 남성이 말하는 양성평등이 이뤄질 수 있을까. 대화는 물론 이야기할 때마다 스스로 검열하게 하는 분위기 속에서는 새해가 밝아도 문제가 개선될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만나면 이야기를 용기 내 민감한 주제를 물어보려고 한다. 진짜 무서운 것은 혐오보다 무관심일 테니까.

이창훈 사회2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