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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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학조부모 교육프로그램

“아이 입시에 성공하려면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재력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 요즘은 ‘할머니의 운전 실력’이 하나 더 추가됐다.” 할머니·할아버지가 손주의 육아를 넘어 교육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세태를 풍자한 말이다. 학부모 모임과 학원 일정 관리, 숙제까지 조부모의 손길이 닿고 있다고 한다. ‘학조부모’, ‘할머니 치맛바람’이라는 말도 유행이다.

 

조부모가 손주를 키우고 교육하는 격대 교육은 지금보다는 덜하지만 동서고금이 따로 없이 존재했다. “때리는 걸 멈추자 손자가 한참을 엎드려 우는데 늙은이의 마음도 울고 싶을 뿐이라.” 조선시대 유학자 이문건(1494∼1567)이 손자 수봉을 16년간 기르며 기록한 ‘양아록’의 한 대목이다. 이문건은 병든 외아들을 대신해 2대 독자인 손자 양육에 몰두했다. 할아버지의 인성교육을 받은 수봉은 임진왜란 때 출병해 전공을 세우고도 상을 사양했다. 많은 사람이 존경심을 표현했다고 한다.

 

부모 이혼으로 외조부모 손에서 자란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은 “내가 편견 없이 자랄 수 있었던 건 외할머니 덕분이다. 외할머니는 늘 ‘흑인이라고 기죽지 마라. 당당하게 살라’는 말로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다”고 고마워했다.

 

과도하게 욕심을 부리는 부모와 달리 조건 없는 사랑과 무한한 지지를 주는 조부모의 격대 교육은 장점이 많다고 한다. 조부모 격대교육을 경험한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 아이들보다 자존감이 높고, 도전의식이 강해 학업성적이 좋고 성인이 된 후에도 성취도가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서울시교육청이 6시간 과정의 ‘학조부모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해 이르면 4월부터 5개 초등학교에서 시범 운영한다고 13일 밝혔다. 조부모를 대상으로 이런 프로그램이 운영되기는 처음이다. 학조부모들은 자녀를 한 번 키워봤다는 생각에 교육관을 쉽게 바꾸지 않아 자녀인 학부모와 갈등을 빚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이를 조정해나가는 방법이 교육프로그램에 담길 예정이다. 우리나라의 533만 맞벌이 가구 아이 2명 중 1명이 조부모 슬하에서 자라는 요즘이다. 조부모 성품과 양육법이 손주 미래를 좌우하는 시대가 되고 있다.

 

김환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