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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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신단이 만난 새 세상, 淸 베이징 ‘유리창·천주당’

‘연행록’ 분석한 ‘조선 선비의 중국견문록’ / 상점들 몰려 있는 유리창 ‘핫플레이스’ / 대형서점 장서 10만권… 서적 구입 필수 / 조선 열악한 서적문화 반성하는 계기 / 정조 “주자학 질서 흔든다”… 수입 금지 / 천주당에선 서양인 만나 각종 견문 넓혀 / 1800년대 초 천주교 박해로 교류 끊겨
“책들이… 당연히 알아야 함에도 지성의 빛이 아직 밝지 않은 탓에 우리는 아직 이 가르침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만난 독일 출신 선교사 아담 샬에게 보낸 편지에서 서양의 문물에 대한 관심과 그것을 조선에 도입하고 싶은 의지를 드러냈다. 그러나 조선의 현실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하다지만, 소현세자의 바람이 현실이 되고 그가 무사히 임금에 즉위했다면 훗날 조선이 열강에 속수무책으로 짓밟히고 일제의 식민지로 떨어지는 일은 없었을까.

극도로 폐쇄적이었던 조선에서 청나라는 새로운 지식을 흡수하고, 외국과 접촉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다시피 했다. 특히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으로 파견된 사신단은 조선과 외부세계를 잇는 접점이었다. 그들이 수입한 지식과 문물, 정보가 없지 않았으나 주저함이 컸고, 편견이 작용했으며, 결국엔 스스로 교류를 거부하는 상황에 이른다. 사신단으로 참여했던 선비들이 쓴 ‘연행록’을 분석한 ‘조선 선비의 중국견문록’(김민호 지음, 문학동네)에서 조선 정부와 지배층의 이런 태도를 읽을 수 있다.

◆“그 책이 있어도 나라에서 금하니 가져갈 수 없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북경의 유리창은 ‘핫플레이스’였다. 온갖 진기한 물건들을 파는 상점들이 몰려 있는 곳인데, 특히 관심을 끌었던 것은 양과 질 모두에서 압도적인 서적이었다. 서점 중 규모가 큰 곳은 장서가 10여만권, 작은 곳은 5만∼6만권에 이를 정도였다. 사신단의 목적 중 하나가 서적 구입이었던 만큼 유리창 방문은 반드시 해야 하는 일로 생각했다. 유리창은 조선의 열악한 서적문화를 반성하는 계기이기도 했다. 박제가는 “서사(서점) 주인이 매매 문서를 뒤적이며… 쉴 틈이 없는 것을 보았다”며 “그런데 우리나라의 서쾌(책장수)는 책 한 종을 옆에 끼고 사대부집을 두루 돌아다닌다 하더라도 어떤 때는 여러 달 걸려도 팔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주요한 통로였지만 사신단의 평가가 마냥 긍정적인 것은 아니었다. 홍대용은 유리창의 규모에 감탄하면서 “그저 모두 이상한 재주에 음탕하고 사치스러운 물건들로 사람의 뜻을 해치는 것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문에 밝은 유리창 상인들의 행태에도 못마땅해했다.

급기야 중국에서 책을 들여오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가 나오기도 했다. 정조는 1786년 중국 서적 수입 금지령을 내렸다. 해마다 엄청난 양의 중국 서적이 들어오자 이른바 ‘문체반정’을 일으킨 것이다. “서양의 천주교 서적과 지리서, 양명학과 고증학 서적, 패관소품문과 각종 소설이 주자학이 질서를 흔들고 세상을 어지럽힌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 때문에 연행록에는 원하는 책을 가지고 가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표현한 것이 눈에 띈다. 김정중은 1791년 베이징을 방문해 책을 구하느라 사력을 다했던 일을 적은 글에서 “설사 그 책이 있다 하더라도 나라에 잡서를 금하는 법령이 있으니 결코 가져갈 길이 없다”고 썼다. 
중국 베이징의 유리창(왼쪽 사진)과 천주당의 현재 모습. 조선 사신단은 유리창에 들러 서적을 구매했고, 천주당에서는 서양인들을 만나 서양의 지식과 문화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문학동네 제공

◆긍정→부정, 서양을 대하는 사신단의 태도

아담 샬을 보는 소현세자가 그랬듯 베이징에서 서양인들을 만난 사신들의 초기 평가는 나쁘지 않았다. 사신들은 베이징에서 “일반적으로 천주당 구경을 갔고”, 그곳에서 서양인들 만났다. 1720년 베이징을 찾은 이기지는 서양인들의 첫인상을 “예모가 매우 공손”하고 “범상치 않은 모습”이라고 묘사했다. 선교사들을 숙소에까지 초대해 필담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서양의 지식을 기존의 성리학적 기준에 따라 평가하는 경우가 잦았다. 이기지는 정해진 때에 일식, 월식이 일어난다는 서양인 설명을 임금의 덕이 부족하거나 정사가 혼란스러우면 일식이 일어난다는 전통적 관념에 따라 비판했다. 서양인들이 선교를 위해 조선에 들어오고 싶다고 하자 “우리나라에 오래 살다가 그 허실을 자세히 알아내어 고국으로 돌아간다면”이라며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신단과 서양인의 서로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으로 바뀌었다. 서양인들은 “조선인들이 세상에서 제일 교활한 사람들”이라고 했고, 사신단은 자신들과의 만남을 피하려는 서양인들에 대한 불만을 표시했다. 이는 서양인들은 천주교 전파를 위해 사신단을 만났으나, 사신단은 이런 부분에는 눈감은 채 자신들의 관심사에만 집중했기 때문이다.

결국 1800년대 초반 조선에서 천주교 박해사건이 발생하면서 교류는 끊기다시피 한다. 1832년 베이징을 방문한 김경선은 “서양의 기술은 지금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금하고 있어 서로 접촉을 허락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음사가 심하다는 말을 듣고는 눈으로 보거나 발로 밟으려고도 하지 않는다”고 적었다. 1860년대 방문 후 편찬된 연행록에는 천주당 관련 언급이 나오기는 하지만 “출입을 금하여 들어가지는 못하고 밖에서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이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