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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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눈이라도 내렸으면

임진왜란이 터진 선조 25년, 1592년. 명 제독 이여송이 압록강을 건너온 것은 12월이었다. 4만 군사를 이끌고 왔다. 그해 겨울에는 폭설이 내렸다. 이런 기록이 남아 있다.

“이여송은 방렬로 진을 꾸렸는데, 폭설이 내려 눈은 허리까지 쌓였다. 하지만 병사들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는 달랐다. 반차와 시위가 마구 뒤섞여 시끄럽게 떠들어 대니, 해이한 기강이 이와 같았다.”

반차는 벼슬의 높고 낮음, 시위는 임금을 호위하는 군사다. 이여송은 요동총병 이성량의 아들로, 조선족이었다. 평양성을 빠져나가는 선조를 향해 “너희들이 나라의 녹만 도적질하다가 이제 나랏일을 그르치고 백성 속이기를 이같이 한단 말이냐”며 울부짖은 백성들. 허리까지 쌓인 눈이 잠시라도 왜병의 살육을 멈추게 할 테니 폭설을 반겼을까. 아니면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고통에 신음했을까.

폭설은 유럽과 미국을 덮쳤다. 오스트리아에는 최고 3m의 눈이 쌓였다고 한다. 알프스는 진한 은색으로 변했다. 남쪽 발칸반도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도 1m 넘는 눈이 내렸다. 전력·통신선, 도로가 끊겨 비상사태까지 선포했다. 미국 중서부∼동부 해안에는 눈폭풍 ‘지아’가 밀려들었다.

우리나라는 다르다. 눈 구경하기가 힘들다. 남쪽 지방에 지난달 잠깐 눈을 뿌렸지만 전국 곳곳이 ‘마른 겨울’이다. 서울·경기·강원에는 20일이 넘도록 건조특보가 이어진다. 산불은 곳곳에서 일어난다. 삼척에서는 축구장 10개 면적의 산에 빼곡하던 아름드리나무들이 잿더미로 변했다. 하천도 바닥을 드러냈다. 지난 크리스마스 때에도 눈 한 번 오지 않은 마른 겨울. 겨울은 차가운 공기로 확인할 뿐, 하얀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눈사람, 눈싸움, 눈 위 발자국…. 그런 낭만은 사라졌다.

낭만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일까, 갈등은 어느 때보다 요란하다. ‘고집스러운’ 소득주도성장 정책, 경제난을 두고 벌어지는 프레임 시비, 적폐 논쟁, 신재민 사무관·김태우 수사관 논란…. 피로는 쌓인다. 많은 사람은 행복한 것 같지 않다. 이런 생각을 해 봤다.

“눈이라도 내렸으면. 그래서 세상 지저분한 것을 덮어 버리면 행복은 다시 찾아들까.”

강호원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