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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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연국의 행복한 세상] 하루(春)의 봄날

묵비사염(墨悲絲染) 이란 말이 있다. 옛날 중국의 묵자가 흰 실이 물드는 것을 보고 슬퍼했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말이다. 하루는 묵자가 어떤 사람이 염색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파란 물감에 흰 실을 담그자 파랑색 실이 되고, 노란 물감통에 실을 넣었더니 노랑색 실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교육이나 환경에 따라 성품과 습관이 좋게 변하기도 하고 나쁘게도 바뀔 것이다. 그러나 물감을 들인 실이 원래의 흰 실로 다시 돌아가기 힘든 것처럼 사람 역시 나쁜 것에 한번 물들면 고치기 어렵다. 묵자는 이런 생각에 미치자 그만 슬퍼졌다고 한다.

묵자의 고사처럼 행복에서도 주변 환경이 매우 중요하다. 행복하려면 무엇보다 좋은 것과 자주 접촉해야 한다. 밝고 아름다운 존재와 가까이하면 나의 기분이 덩달아 좋아지기 때문이다. 꽃이든 책이든 음악이든 취미든 상관이 없다. 그 중에서도 좋은 사람과 사귀는 것이 으뜸이다.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과 가까이하면 행복한 기분이 들지만 원망과 증오로 찌든 사람과 만나면 나도 모르게 우울한 감정에 젖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과 인연을 맺는 일은 엄청난 행운이자 축복이다.

지난 주말에 나는 그런 축복을 누리는 행운을 얻었다. 동문들과 1차 모임을 끝내고 2차 장소로 가던 도중에 어떤 가게 앞을 지나면서 지인이 나에게 말했다. "여기 부부가 당신의 행복편지를 매일 읽고 있는데 꼭 만나보고 싶다고 그래." 그 말을 듣고 가게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부부와 나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그날 장사를 끝낸 부부는 둘이서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2차 장소로 걸어가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뛰어왔다. 가게 안에서 식사를 하던 그분이었다. 아주머니는 황금색 한라봉을 나에게 내밀고는 사라졌다.

2차 모임을 하던 도중에 나는 지인의 안내로 부부의 가게를 찾았다. 부부는 봄꽃처럼 환한 미소로 우리를 맞았다. 아주머니는 가족들과 함께 나의 행복편지를 읽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다고 말했다. 저자 사인을 받기 위해 나의 책 '소확행' 4권을 사놓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 힘이 된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횟집을 하면서 매일 물고기들을 죽이고 있어요. 산 목숨에 칼을 댈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아요." 횟감을 손질하는 남편의 말이다. 심성이 착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횟집의 아주머니는 내 글이 계기가 되어 매일 소소한 일들을 노트에 적고 있다고 했다. 나의 민들레 꽃씨가 그분의 가슴으로 날아와 노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부부의 가게 이름은 '하루'이다. 하루는 봄(春)을 뜻하는 일본말이다. 아직은 맹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이다. 하지만 매일 봄이 하루씩 다가오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황금빛 민들레꽃으로 물든 하루의 봄날이 기다려진다.

배연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