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파견법관'은 왜 민원·로비 창구로 전락했을까? [이슈+]

서영교 등 현역의원 재판 청탁 파문/상고법원 공들이던 양승태 사법부/ 국회 지원 얻으려 청탁받은 의혹/ 헌재 기밀자료 유출 이어 또 논란/ 학계 “업무협조 순기능 인정 필요/ 숫자 줄이고 법으로 역기능 보완”/“사실상 스파이… 없애야” 강경론도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국회에 파견 근무 중인 법관을 ‘민원 창구’로 활용했다는 의혹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하고 있다. 파견 법관을 활용해 헌법재판소 기밀 자료를 유출했다는 혐의에 이어 불거진 또 다른 의혹이다. 학계를 중심으로 “파견 법관 제도를 손질해야 한다”는 비판 목소리가 거세다.

16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영교(사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15년 5월 국회에 파견 근무 중이던 김모 부장판사를 의원실로 불러 “지인 아들이 형사 재판에서 가벼운 형량을 선고받도록 도와달라”고 청탁했다. 서 의원 측근 이모씨의 아들이 귀가하던 여성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추행하려 한 혐의(강제추행미수)로 서울북부지법에서 1심 재판을 받던 중이었다.

서 의원은 김 부장판사한테 “강제추행미수는 인정되지 않는 것 아니냐. 벌금형으로 해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현역 의원이 파견 법관을 민원 창구로 삼아 ‘피고인’ 측이 희망하는 죄명과 형량을 대신 전달한 것이다. 이 내용을 보고받은 임종헌(구속기소) 전 행정처 차장은 문용선 당시 법원장을 통해 담당 판사한테 서 의원의 뜻을 전했다. 선고를 불과 사흘 앞둔 그해 5월18일이었다.

서영교 민주당 의원
서 의원 외에도 같은 당 전병헌 전 의원과 이군현·노철래 전 자유한국당 의원이 각자 정치자금법 위반 사건을 잘 처리해달라는 등 민원을 파견 법관을 통해 행정처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양승태 사법부’가 숙원사업인 ‘상고법원’ 도입에 국회 차원 지원을 바라고 의원들의 민원을 개별 재판부에 전달한 것으로 판단한다.

사법부가 파견 법관에게 부적절한 지시를 내려 수사 선상에 오른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양 전 대법원장은 2015년 2월 헌재 내 각종 기밀자료를 불법 유출하라고 이규진 당시 양형위원회 상임위원(현 서울고법 부장판사)에게 지시한 혐의도 있다. 이 전 상임위원은 헌재에 파견 근무 중이던 최모 부장판사를 통해 재판관 ‘평의’ 내용 등 내부 정보를 입수해 양 전 대법원장에게 보고한 것으로 조사됐다.

파견 법관 제도가 재차 악용되고 있지만 감사원과 국회, 헌재 등 기관에서 다수 법관이 지금도 근무 중이다. 과거 공정거래위원회와 통일부, 환경부 등에서도 근무했던 것에 비하면 그나마 줄어든 편이다.

학계에서는 법관 윤리를 개인에게 맡길 수 없다면 최소 법으로라도 못 박아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늘어나는 사건 수를 고려해 파견 법관을 재판 업무에 복귀시켜야 한다는 목소리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한국헌법학회장을 지낸 숭실대 고문현 교수(법학)는 “파견 근무를 하는 법관은 해당 기관 소속으로서 업무에 충실해야 한다”며 “내부 정보를 유출하지 못하도록 법안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만 “기관 간 업무협조 등 순기능이 있는 만큼 완전히 없애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반면 임지봉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는 “파견 법관 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잘라 말했다. 임 교수는 “파견 법관이 국회와 연결고리로 이용되고, 나아가 헌재 내 여러 중요 재판 정보를 파악해 행정처에 알려주는 통로로 악용되고 있다”며 “사실상 ‘스파이’, ‘로비 창구’인 만큼 없애는 게 맞다”고 했다. 다만 대법원 관계자는 “국회 등 외부 기관이 먼저 파견 요청을 해 응하는 것”이라며 말을 아꼈다.

배민영 기자 goodpoint@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