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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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권은희·신재민 무엇이 다를까

2012년 언론사 입사 준비생이 그러하듯 대학생 시절 가방엔 늘 신문 1부씩 넣고 다녔다. 별다른 약속이 없으면 9시 뉴스는 챙겨봤다. 그중에서도 기자의 큰 관심은 ‘국가정보원 여론 조작 사건’이다.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현 더불어민주당) 후보와 박근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후보가 격돌한 제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국가정보원 요원들이 인터넷에 댓글을 남긴 사건이다.

당시 수사를 맡은 권은희 수서경찰서 수사과장은 윗선에서 압수수색을 하지 않을 것을 지시하는 등 외압을 받았다고 폭로했다. A4 크기 노트에 ‘권은희 사건일지’를 정리했다. 일지 끝자락에 빨간 동그라미를 친 문구는 아직도 인상 깊다. 내가 권은희라면?

염유섭 사회부 기자
권은희 전 과장은 안쓰러운 존재였다. 어렵다는 사법고시에 합격한 후 여성 최초로 경정에 특별채용돼 수사과장 자리에 올랐다. 탄탄대로를 걷던 그가 왜 외압을 폭로했을까. 조용히 있었다면 공로를 인정받아 잘나갔겠지. 훗날 정권이 바뀌어도 윗선이 시켜 어쩔 수 없었다고 둘러댄다면 큰 피해는 입지 않았을 것이다. 걱정에 답하듯 2014년 그는 경찰청 총경 승진 인사에서 누락됐다.

권은희 전 과장에 대한 생각이 바뀐 건 정치권, 특히 민주당이 그를 ‘광주의 딸’로 부른 이후부터다. 당시 야당인 민주당은 권은희 전 과장을 ‘공익제보자’로 감쌌다. 민주당은 “당력을 총동원해 광주의 딸, 권은희를 반드시 지키겠다”고 공언했다. 그는 경찰직을 관두고 광주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국회의원 배지를 달았다. 수사과장에서 광주의 딸, 국회의원으로 탈바꿈했다. 침묵하지 않은 공익제보자가 보답을 받았다. 내가 2012년 당시 권은희라면 외압을 폭로했어야 할까.

6년가량이 지났다. 제2의 권은희가 나왔다. 이번엔 경찰이 아닌 기획재정부였다. 신재민 전 기재부 사무관이 국채발행, KT&G 사장 선임 과정에서 외압이 있었다고 폭로했다. 다행히 권은희 전 과장을 광주의 딸로 부른 당시 야당이 정권을 창출했다. 신 전 사무관은 ‘광주의 아들’이 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그는 광주의 아들이란 칭호를 못 얻었다. 오히려 대통령의 입을 통해 ‘자신이 경험한 좁은 세계로 (문제를) 판단하는 인물’이 됐다. 기재부는 신 전 사무관을 공무상비밀누설 혐의로 고발했다.

국가정보원 여론 조작 사건 당시 권은희 과장을 비난했던 새누리당은 180도 달라졌다. 권은희 전 과장을 향해 정치를 하기 위해 양심고백을 했다고 비난했던 새누리당은 신 전 사무관에 대해서는 ‘공익제보자’라고 감쌌다. 권은희와 신재민이란 동일한 상황에 처한 두 사람을 두고 여야가 6년 만에 정반대의 태도를 취하고 있다. 보수와 진보를 떠나 공익제보자는 보호돼야 한다. 그러나 이번 신재민 사태는 6년 전 권은희 사태와 더해지며 정치권의 씁쓸한 단면을 보여준다. 공익제보자를 지키자는 원칙보단 당리당략에 따라 행동할 뿐이다. 이제 권은희 사건을 정리한 일지에 동그라미 쳐진 ‘내가 권은희라면’에 대한 질문의 답은 명확해졌다. 가만히 있자. 다만 정치권을 향해 묻고 싶다. 권은희와 신재민은 무엇이 다른가.

염유섭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