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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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잊혀가지만…아직은 여기가 내 자리입니다" [밀착취재]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가는 ‘우체통’을 찾아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1년 365일 같은 자리를 지킵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이야기를 전해주기 위해서입니다. 가끔은 지나가는 자동차가 나를 쳐 힘들기도 합니다. 눈에 잘 띄는 곳에 자리를 잡았지만 지나는 사람들 눈엔 잘 안 보이나 봅니다. 온몸이 붉은색으로 돼 있는데도 말이죠. 엄밀히 말하면 금적색입니다. 요즘은 나를 이용하는 사람들이 더 적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중 많은 수가 사라졌습니다. 슬퍼하진 않습니다. 다른 많은 것들도 그러니까요.”
우체통이 사람이 다니는 인도 끝에 위태위태 서있다. 사람들은 하염없이 지나가고 차들도 쌩쌩 달린다. 가끔은 지나는 차가 덮치기도 한다. 사람들 눈에 확 띄는 금적색으로 유혹하고 있지만 찾는 사람들은 없다.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 서운하지만 현실이다.
많은 것들이 사라져간다. 우체통도 그중 하나이지 싶다. 이 땅엔 언제부터 우체통이 있었을까. 1884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우편업무가 시작되며 설치된 우체통은 일정한 심벌마크나 정해진 모양이 따로 없는 목재 형태의 우체통이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둥근 모양의 철제 우체통이었고 지금은 플라스틱 재질의 붉은색 우체통이다. 45×45×126㎝.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우체통의 크기다. 초등학생 1, 2학년 정도의 키다. 섬유강화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잘 부서지지도 않는다. 사람들 눈에도 확 띄는 빨간색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제가 담당한 우체통이 열 군데 정도였어요. 지금은 세 군데밖에 안 되지만 그나마도 우체통에서 나오는 게 별로 없어요. 관리구역인 국립민속박물관 내에 설치된 우체통엔 외국인들이 보내는 엽서가 꽤 있기도 해요. 광화문 거리에 설치된 우체통에선 지갑, 신분증 등이 자주 나와요. 유인물이 나올 때도 있어요. 손으로 쓴 편지도 가끔 보긴 하는데…. 대학가 주변 우체통엔 손편지들이 꽤 있어요.” 30년 경력의 이성대(55) 집배원이 얘기한다.
30년 경력의 이상대 집배원이 국립민속박물관에 설치돼 있는 우체통에서 우편물을 수거하고 있다.
광화문 거리의 우체통에서 나온 지갑과 주민증. 주소를 보니 경기도 어디쯤이다. "지갑 안에 든 돈의 액수, 신분증 등을 확인해 주인에게 다시 돌려주고 있다. 이런 게 많이 나온다. 우리 일들 가운데 하나다." 이상대 집배원의 말이다.
국립민속박물관 내에 설치된 우체통. 박물관을 찾은 외국인이 누군가에게 보내는 엽서가 한 통 들어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을 찾은 외국인이 누군가에게 보내는 엽서.
이상대 집배원이 광화문 거리에 설치돼 있는 우체통에서 많지 않은 우편물을 수거하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뒷거리에 설치된 우체통에선 우편물이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이런 날도 자주 있다고 한다.
우체통마다 고유의 바코드가 있다. 우편물을 수거한 뒤 휴대용 정보단말기로 우체통에 부착된 바코드를 스캔하면 작업 완료를 확인할 수 있다.
이상대 집배원이 휴대용 정보 단말기를 확인하고 있다. 우체통 수집 결과가 바코드 스캔으로 자동 저장된다.
이상대 집배원이 광화문우체국 복도 구석에 세워놓은 우체통들을 살펴보고 있다. 만약을 위해 여분으로 남아 있는 우체통들이다.
“사설 우편함에선 기업들이 고객들에게 보내는 우편물이 많아요. 고정적으로 많이 나옵니다. 거리의 우체통에선 분실물을 자주 수거하지요. 우편물이 많진 않습니다.”

강남역 부근에서 5개의 우체통을 관리하는 김정호 집배원이 우체통을 물티슈로 정성스레 닦는다. “이 우체통은 먼지가 자주 쌓입니다. 우편물을 보내려고 우체통 앞에 섰는데 더럽고 먼지 쌓여 있으면 기분이 좋지 않겠죠.”
김정호 집배원이 공중전화부스 옆에 설치된 우체통을 물티슈로 닦고 있다. 이곳의 우체통은 먼지가 많이 쌓여 가끔 닦아준다고 한다. 먼지로 뿌옇던 우체통이 반짝반짝 윤이 났다. 물티슈가 아예 우체통 안에 들어 있다.
김정호 집배원이 우체통에서 꺼낸 우편물을 보여주고 있다. 누군가가 분실한 지갑이 들어있다.
김정호 집배원이 공중전화 박스 옆에 설치돼 있는 우체통에서 우편물을 확인하고 있다. 단 2건의 우편물 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사설 우편함에서 우편물을 수거하는 모습. 우편물이 많은 기업 등에서 우체국에 의뢰해 따로 설치한 우편함이다.
우표 대신 사용하는 선납라벨. 자주 우편물을 부쳐야 하는 곳에선 우표 대신 선납 라벨을 대량으로 구입해 사용한다.
1993년은 우리나라에서 우체통이 가장 많았던 시기다. 전국에 5만7599개의 우체통이 자리를 지켰다. 25년이 흐른 2018년 말 기준으로는 1만2855개만 남았다. 10년 전만 해도 우체통 하나당 연간 이용률이 3432건, 일일 평균 13.7건 정도였지만 2017년엔 연간 이용률이 1623건, 일일 평균 6.5건으로 이용 건수가 반으로 줄었다. 거리에 남아 있는 우체통이라도 3개월 동안 이용 물량이 없는 것은 일주일 이상 철거 안내문을 부착해 불편신고 사항이 없으면 철거된다. 얼마 전 KT 아현지사 지하통신구 화재로 이동전화가 불통돼 시민들이 주변 공중전화 앞에 길게 줄 선 풍경도 있었지만 우체통 앞에 시민들이 줄 서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신년 인사 카드도 크리스마스 인사 카드도 스마트폰으로 보내는 요즘 세상이라…. 사라진다는 게 나쁜 건 아니지만 아쉽고 서운한 건 사실이다.

글·사진=허정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