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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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집 걱정 없이 살 날 오긴 할까

“월세를 두 배 올린대. 그냥 나가라는 거지.”

의류매장을 운영해온 A가 “어떻게 지내냐”는 한마디에 대뜸 쏟아낸 말이었다. 모처럼 긴 설 연휴의 여유를 즐길 틈 같은 건 없었다.

A는 5년 전 경기 고양의 한 주상복합건물 상가에 매장을 차렸다. 나름 목이 좋은 곳이라 600㎡ 남짓한 매장은 그럭저럭 잘 돌아가는 편이었다. 더 매장을 잘 운영해 매출을 올리고 곧 가족을 꾸려야겠다는 희망에 부푼 그는 지난여름 수천만원을 들여 매장 리모델링에 나섰다.

최저임금 인상의 영향이나 불경기 등의 이야기는 자신과 크게 관련이 없을 것 같았다. 계약 만료가 석 달 남은 지난달 갑작스럽게 월세 인상을 통보받기 전까지는. 상가 운영 업체는 재계약 조건으로 300만원인 월세의 두 배 인상을 요구했다.

계약 연장이 무난할 것이라는 ‘구두약속’을 철석같이 믿은 A는 한숨만 내쉬었다. “구두약속을 왜”라는 한 친구의 말에 한숨이 더 커지자, 결국 그 말을 마무리조차 할 수 없었다. 10여년 만에 한데 모인 친구들이었지만 등을 토닥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B는 결혼한 지 10여년 만인 지난해 아들을 낳았다. 서울에 거주하다가 결혼하며 경기 군포에 터전을 마련한 B는 전월세를 전전하다가 3년 전 아파트 한 채를 마련했다. 월 100만원에 가까운 은행 이자가 따라붙었다.

“맞벌이라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앞으론 암담하네.”

아이를 갖기로 마음먹으면서 나름의 준비는 했지만 10년 가까이 익숙해진 소비 및 생활 방식을 바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름의 기회비용이라 생각했던 주거비용의 무게는 숫자만 같았지 체감은 훨씬 커졌다. B는 “신혼 때만 해도 ‘서울에 다시 복귀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라도 했는데, 이제는 ‘인(in) 서울’의 꿈도 꾸지 않아”라고 말했다.

비혼여성을 주창하던 C는 2년 전 결혼하며 가치관이 ‘딩크(아이를 갖지 않는 맞벌이 부부)’로 바뀌었다. C는 이날 멤버 중 몇 안 되는 서울 거주 기혼자였다. A와 B를 비롯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던 그는 “아주 가끔은 아이를 가져볼까 생각을 하지만 그러기 위해 직업이나 인서울을 포기하기는 여전히 무리”라며 “지난 2년간 결혼생활은 물론 당분간은 자신과 남편의 부모에게 딩크족의 삶을 설득하는 노력이 계속될 것 같다”고 말했다.

김준영 산업부 기자
저마다 자신의 삶에 대해 토로했지만 귀결은 집, 부동산이었다. 직업과 장래에 대해 이야기하던 10여년 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전세계약 중간에 집주인이 바뀌어 온갖 갑질에 시달리다가 이사 날까지 보증금을 제때 받을 수 있을지 전전긍긍했던 나의 사연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었다.

각자의 사연 중간중간에는 정부의 부동산 대책이나 뉴스·커뮤니티 등을 통해 들은 부동산 팁에 대한 이야기도 곁들여졌다. 딱히 결론이나 답을 바라지는 않았다. 어차피 현 상황에서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에는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으니까.

두어 시간이 흐른 뒤 한 친구가 “집 걱정 없이 살 수 있는 때가 오긴 할까”라고 말했다. 잠시 정적이 흐른 뒤 바로 옆에 앉은 친구가 “가자”라고 하자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30대 중·후반 10여명이 10년 만에 모인 자리는 그렇게 마무리됐다.

김준영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