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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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만하지 말입니다"…확 달라진 군대 가보니 [밀착취재]

침상에 누워 모바일 게임하고 여친과 카톡도 / 장병들 SNS 즐기며 친구 근황 살펴 / 유튜브·인강 통해 자기계발도 열중 / 일과 후 4시간 동안 평일 외출 허용 / 병원진료·면회 등 개인용무에 활용 / 딱딱한 군대 말투 ‘다, 나, 까’ 안쓰고 계급 간 호칭 없이 전원동기제 적용 / PX는 상병 이상 등 불문율도 사라져
강원 철원의 육군 청성부대 생활관. 각자의 침상에서 편하게 휴식하는 장병들의 손에 스마트폰이 들려 있다. 연락이 뜸했던 친구들에게 카카오톡을 보내고 유튜브, 페이스북 등으로 부대 내에서 세상과 소통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낯설다. 설 연휴를 앞둔 지난달 31일 방문한 청성부대에선 확 달라진 병영문화를 체감할 수 있었다.

8일 국방부에 따르면 오는 4월이면 전국 대부분의 부대에서 병사들이 일과 시간 이후와 주말에 휴대전화를 쓸 수 있다. 3개월간의 시범 운영을 거친 뒤 이르면 7월부터 일과 후 휴대전화 사용이 전면 허용될 것으로 전망된다. 주말 위주로 실시했던 병사들의 외출도 지난 1일부터 평일 일과 후에도 월 2회 허용되고 있다.
 
사회와의 자유로운 소통을 통해 장병들의 고립감·단절감을 어느 정도 해소하고, 자기 계발 기회 확대와 건전한 여가선용 여건 보장 등을 위해 국방부가 지난해부터 본격 추진하는 정책들이다.

육군 청성부대 소속 장병들이 지난달 31일 부대 생활관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하며 일과 후의 여유를 즐기고 있다. 육군 제공
군대와 바깥세상의 단절도 군기를 잡는 수단으로 여겨졌던 시절이 있었다.
“사병들이 삐삐(무선호출기)를 버젓이 찬 채 내무생활을 하고, 내무반 밖에서는 공중전화를 걸어대는 군대가 (제대로 된) 군대인가!” 1996년 10월 열린 국방부 국정감사에서 국회 국방위 소속 한 국회의원이 일갈했다. 삐삐 사용이 보편화하던 시기, 일부 부대의 ‘짬밥이 되는’ 몇몇 사병들은 삐삐를 군부대에 들여와 썼다. 그러나 그들만의 비밀은 오래가지 않았고 논란은 커졌다. 두 달 뒤 국방부는 이듬해부터 사병들의 삐삐 사용을 전면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그 후 강산이 두 번도 더 변한 2019년. 삐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국민 10명 중 9명은 스마트폰을 쓴다. 군대에서도 공중전화 수화기만 잡고 있진 않다. 병영의 풍경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육군 청성부대 소속 병사가 지난달 31일 부대 내 생활관에서 마스크팩을 얼굴에 씌운 채 휴대전화를 사용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 육군 제공
◆침상에 누워 모바일 게임하고 여친과 카톡하며 ‘웃음꽃’

군대 휴가 복귀를 위해 위병소를 통과할 때는 항상 서늘한 뒷바람이 불었다. 부대의 도움을 받아 차를 타고 위병소를 통과하니 군복무 시절 받았던 느낌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전역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야릇한 긴장감은 남아 있는 모양이다.

위병소를 통과하자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너른 공간에 깔끔한 4층 건물 한 동이 나왔다. 멀리 사격장이 보이지 않았다면 학교로 착각했을지도 모르겠다. 대대본부와 중대별 단층 막사, 여러 동의 반원통형 창고가 이곳저곳 설치돼 있던 기자의 기억 속 부대 풍경은 어느새 사라졌다.

설 연휴를 앞둔 지난달 31일 강원 철원군 소재 육군 청성부대를 찾았다. 이 부대는 지난달 21일부터 장병들의 일과 후 휴대전화 사용을 시범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휴대전화 사용 열흘째를 맞은 장병들의 병영생활을 들여다봤다.

◆침상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게임, SNS, 인터넷 강의도…

일과 후 세탁기에 돌린 빨래를 건조기에 넣고 있던 최연종 일병의 휴대전화가 부르르 떨린다.(※장병들의 인터뷰 내용을 바탕으로 각색했습니다.) 최 일병의 표정이 밝아지는 걸 보니 여자친구의 전화다. 한참 동안 이어진 통화 후 최 일병은 다시 휴대전화로 여자친구에게 카카오톡 메시지를 보냈다. 내용을 보려 하자 슬쩍 화면을 돌린다. 이 부대는 1층에 있는 지휘통제실 등 군 업무 공간 외에는 모든 곳에서 휴대전화를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최 일병은 “개인 휴대전화를 쓰니 카톡도 주고받을 수 있고, 여자친구가 먼저 전화할 수 있는 점도 좋은 것 같다”며 “공중전화나 생활관마다 한 대씩 배치된 용사수신용핸드폰에 비해 프라이버시도 보장될 수 있다”고 말했다.

장병들이 개인 휴대전화를 쓰면서 인적이 뜸해진 곳은 휴게실 한편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다. 열흘 전만 하더라도 사람이 몰릴 때면 줄을 서야 했던 곳이 이날은 텅텅 비어 있었다.

“야야 왼쪽, 왼쪽에 (적이) 있어.” 왁자지껄한 생활관으로 들어가니 이준형 병장이 다른 장병 2명과 휴대전화로 함께 게임을 하고 있다. 여러 명이 함께 정해진 전장에서 전략과 기술을 활용해 최후의 생존자를 가리는 ‘배틀그라운드 모바일’이라는 게임이다.
축구를 좋아하는 이현석 일병은 침상에 누워 유튜브로 ‘축구 개인기 스페셜’ 영상을 보며 따라 발재간을 부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즐겨 보던 웹툰을 보며 피식피식 웃는다.

친구가 새로 올린 인스타그램 사진에 댓글을 달고 있던 윤현식 일병은 “보안상의 이유로 휴대전화 카메라에 보안스티커가 부착돼 있다”며 휴대전화를 들어 보인다. 그는 “직접 내가 찍은 사진을 올릴 수는 없지만 SNS를 통해 친구들의 근황도 볼 수 있고, 메신저나 전화로 곧바로 연락할 수 있어 매우 만족한다”고 말했다.
체력단련실에서는 여인우 상병이 휴대전화에 연결된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러닝머신 위를 달리고 있다. 어느 정도 몸이 풀렸는지 유튜브에서 ‘벤치프레스의 올바른 운동법’ 영상을 보며 한껏 자세를 잡아본다.

‘학구파’ 혹은 ‘자기개발파’들은 주로 1층 도서관에 자리를 잡는다.

디자인을 전공한 김찬우 상병은 휴대전화로 패션 관련 동영상이나 잡지, 사진 등을 주로 찾아본다. 그는 “꾸준히 살펴봐야 트렌드를 따라갈 수 있어 전역 후 복학할 때도 도움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전자공학을 전공한 강준영 상병은 휴대전화로 공학수학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다. 한 번씩 복습을 해놓지 않으면 까먹을 수 있어서라고 한다. 한재희·김종수·박대중 일병은 일본어와 토익 등의 교재와 함께 휴대전화로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어학 공부 삼매경이다. 김 일병은 “일본어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전역 후 일본 워킹홀리데이를 신청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부대 관계자는 “병사가 희망할 경우 휴대전화를 반납한 후 자정까지도 공부나 독서 등을 할 수 있어, 자격증이나 검정고시를 준비하는 인원도 있다”고 말했다.

지난 1일부터는 장병들의 일과 후 평일 외출도 허용됐다. 장병들은 자기 계발·병원진료·면회 등의 목적으로 오후 5시30분부터 9시30분까지 4시간 동안 월 2회 이내에서 외출을 쓸 수 있다. 평일 외출 시행으로 주말에 몰렸던 외출 인원이 분산된다는 점, 주말까지 기다리지 않아도 개인용무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병사들은 고무적인 분위기다.

부대 관계자는 “과거 군 생활이 힘들었던 이유 중 하나는 사회와의 고립감과 단절감이었다”면서 “평일 외출이나 휴대전화를 통해 병사들이 확실히 밝아지고, 여러 정보를 접하면서 자기 계발에 대한 욕구도 커지리라 기대된다”고 말했다.
◆병영의 변화, 장병 자율성 보장 초점

휴대전화 사용과 평일 외출 외에도 청성부대는 병영문화의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준형아.” 박대중 일병이 이준형 병장을 부르는 호칭이다. 이 부대의 경우 ‘○○○ 병장님’과 같은 병사 계급 간 호칭, 경어도 없는 전원동기제를 최근까지 적용(현재는 6개월 동기제)했었다. 갓 자대배치를 받은 이등병도 제대가 얼마 남지 않은 병장과 동기가 되는 것이다. 과거 군 생활을 한 예비역으로서는 머리가 아플 수밖에 없는 얘기다.

박 일병은 “처음 이 부대에 왔을 때는 말을 놓는 것이 어색했는데 먼저 왔던 친구들이 ‘그냥 해’라고 하고, 편하게 대해줘서 지금은 자연스러워졌다”고 말했다.

육군 청성부대 소속 장병들이 지난달 31일 PX에서 구매할 물건들을 살펴보고 있다. PX에 다양한 물품들이 진열돼있다. 육군제공
병사들끼리는 상위 계급에 대한 경례도 하지 않는다. 딱딱한 군대 말투를 일컫는 ‘다, 나, 까’도 없어졌다. 다만 같은 병사 중에서도 지시를 내릴 위치에 있는 분대장에게는 경어를 쓴다. 계급 간의 벽이 허물어지자 ‘군마트(PX)는 상병 이상만 갈 수 있다’ ‘이병은 침상에 누울 수 없다’는 등 계급에 따라 행동에 제약을 가하던 불문율도 사라졌다.
일과 후 시간 장병들은 철저히 개인 시간의 자유를 보장받는다. 누구의 지시도 없이 온전히 자신의 개인정비 시간과 휴식을 가진다. 부득이하게 일과 후 작업 등을 해야 할 경우는 부대에서 해당 병사에게 ‘시간 외 수당’ 격의 상점을 부여하는데 상점을 모으면 외출, 외박, 휴가로 바꿔 사용할 수 있다.

육군 청성부대 소속 장병들이 지난 1일 부대 내 풋살장에서 풋살 경기를 하고 있다. 육군제공
그러나 훈련 상황에서는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게 장병들의 설명이다.

김찬우 상병은 “훈련 상황은 자칫 다칠 수도 있는 위험한 부분도 있기 때문에 선임병이 지시를 할 수 있고, 후임병은 지시에 따르는 분위기가 형성돼 있다”며 “자신보다 훈련 상황의 경험이 많은 ‘숙련도’를 서로 존중하고, 이에 대한 인식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안 될 것 같다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훈련 상황이 되면 위험할 수도 있는 걸 감지하다 보니 따르게 된다”고 덧붙였다.

식단도 점차 개선되고 있다. 올해부터는 깐쇼새우, 계란프라이, 계란말이, 갑오징어 등이 새로 식단에 오른다. 야간 근무나 훈련 등으로 아침에 늦게 일어나는 장병들에게는 스파게티와 샌드위치 등의 브런치도 제공된다. PX의 물품도 웬만한 부대 밖의 마트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하다. 1개 회사의 10개 제품만 제공됐던 라면은 지난해부터 4개 회사의 50개 제품으로 늘었다. 병사의 봉급도 올랐다. 지난해 기준 병장의 봉급은 40만원, 이등병도 30만원 정도다. 풍족하진 않지만 군대에서 쓰기엔 충분한 액수다. 이 부대 병사의 대부분은 매달 10만원 이상을 넣는 적금을 들었다.
박병철 대대장(중령)은 “휴대전화 사용 등에 대한 일부 우려의 시선이 있지만 병사들을 통제의 대상으로만 삼던 종전 관점에서 접근하면 요즘 세대 병사들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서 “자율성을 부여하면 책임도 그만큼 따라온다는 인식을 가질 수 있도록 이해를 시키려고 하고, 병사들도 이러한 부분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철원=이정우 기자 woole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