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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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퇴진거부에 민심 폭발… 곳곳 불타고 약탈·탈옥도 [세계는 지금]

아이티 반정부 시위 격화 / 경찰 유혈진압에 사망·부상자 속출 / 모이즈 “폭력조직 떠밀려 사퇴 안해” /경제안정 대책도 내놨지만 무용지물 / 2018년 7월엔 유가인상으로 거센 저항 /전·현직 관리 10여명이 40억弗 횡령 /페트로카리베 스캔들 등 부패 심각 / 수면 아래 잠재됐던 불만 결국 터져
비극의 땅 아이티에서 성난 민심이 들끓고 있다. 2010년 대지진의 상흔이 여전한 수도 포르토프랭스 거리를 거대한 반정부 시위대가 뒤덮었다. 지난 7일(현지시간) 조브넬 모이즈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시작된 후 불과 수일 만에 최소 9명이 사망했다.

◆시위 과격 양상 속 대통령 퇴진 불가 선언

카리브해의 가난한 나라 아이티에서 부정부패와 경제실정 책임을 지고 모이즈 대통령이 퇴진할 것을 요구하는 반정부 시위가 계속되며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고 있다.

이날 수천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뒤 아이티 경찰은 총격으로 진압했지만 시위대는 움츠러들기는커녕 더욱 분노했다. 대통령궁을 공격하고 공항으로 진입하는 도로에는 바리케이드를 세웠다. 곳곳에서 타이어 더미가 불탔다. 학교와 상점은 문을 닫았다. 마실 물을 찾기 위해 양동이를 든 사람들이 거리를 서성였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던 지난 15일 중동 매체 알자지라는 현지발 보도에서 “폭력과 위기는 서로 상승작용을 하며 더 심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7일(현지시간)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열린 대규모 반정부 시위. 포
포르토프랭스=AP연합뉴스
주유소와 은행, 상점 등에서 약탈도 모자라 지난 12일엔 한 교도소에서 수형자 78명이 집단 탈옥하는 일도 발생했다. 시위대가 한 손에는 돌을 들고, 한 손에는 사망한 시위대의 시신을 잡아 끌며 앞으로 나아가는 충격적인 모습이 전 세계 언론에 타전됐다. 시위 참가자들은 “조브넬 모이즈는 더 이상 이 나라의 대통령이 아니다. 그가 사임하지 않으면 온 나라를 불태우겠다”고 말하고 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미국은 필수 인력을 제외한 공관 직원과 가족들을 철수시켰고 캐나다는 자국 대사관을 잠정 폐쇄했다.
시위 8일 만에 모이즈 대통령은 국영 TV 연설에서 “나는 무장 폭력조직에 떠밀려 나라를 떠나지 않을 것”이라며 사퇴 요구를 거부했다. 이어 경제를 안정시키겠다고 약속하며 장 앙리 세앙 총리를 통해 가스와 전화 수당, 불필요한 해외출장 등을 없애 공무원 특전을 박탈하는 등 부정부패 방지책을 내놨다. 그러나 수습이 될지는 미지수다. 아이티 경제학자 에처 에밀은 알자지라에 “사람들은 정부를 믿지 않고, 정부의 해결책을 기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다음날 알자지라는 거리는 일단 안정을 찾은 듯하다면서도 “사람들의 불만이 끝난 것은 아니다. 이 도시의 불안은 대통령 사임 때까지는 아직 잠재돼 있다”고 전했다.
지난 7일(현지시간) 아이티의 수도 포르토프랭스에서 열린 대규모 반정부 시위. 
포르토프랭스=AP연합뉴스
◆“페트로카리베 머니는 어디 갔나”

모이즈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격렬한 시위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7월 정부가 유가 인상안을 발표했다가 거센 저항이 일어 취소한 일이 있었다. 정부가 휘발유 38%를 포함해 디젤 47%, 등유를 51% 각각 인상하겠다고 발표하자 이에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최소 7명이 사망했다. 이때에도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컸지만 모이즈 대통령은 총리를 교체하는 선에서 수습했다. 
유가 인상안 반발은 시작일 뿐이었다. 이미 2016년 아이티 의회에서는 페트로카리베(Petrocaribe) 자금을 정부 관리들이 유용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등 야권에서 부정부패를 고발했다. 페트로카리베는 베네수엘라로부터 싼값에 원유를 제공받는 프로젝트로, 아이티 국민에겐 국가 재건 자금이나 다름없었다. 이듬해인 2017년 정부 보고서는 전직 총리 2명과 전·현직 관리 10여명이 페트로카리베 자금 40억달러(약 4조5000억원)를 횡령 또는 유용했다고 발표했다. 부패한 관리들이 페트로카리베를 건드렸다는 것은 민심을 폭발시킨 결정타였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페트로카리베 스캔들은 2010년 1월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지진 이후 수면 아래 잠재됐던 불만을 촉발하는 피뢰침이 됐다”며 “대규모 국제 원조 노력에도 아이티는 여전히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빈곤한 나라”라고 지적했다. 세계은행의 2017년 통계에 따르면 아이티는 1인당 GDP 766달러의 최빈국이다. 국민 1040만명 중 59%가 하루 2.41달러 미만의 돈으로 생활한다. “페트로카리베 머니는 어디로 갔나”는 질문이 아예 반정부시위대의 슬로건이 됐다.
아이티의 반정부 시위의 핵심 이유였던 유가인상안과 페트로카리베는 최근 베네수엘라 위기와도 직결돼 있다.

중남미 거대 산유국인 베네수엘라는 중남미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자국 영향력을 높이려는 목적 하에 원유를 헐값에 꿔줬다. 페트로카리베 프로젝트를 시작했던 우고 차베스 대통령은 사망했고 후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자국의 극심한 경제난과 초인플레이션으로 자신의 대통령직마저 위태로운 처지다. 결국 지난해 페트로카리베 거래는 중단됐다. 베네수엘라가 2005년 페트로카리베 프로젝트를 시작한 뒤 국제 원유가격 하락으로 베네수엘라 위기가 시작된 2015년, 베네수엘라로부터 무상 또는 싼값에 원유를 공급받던 국가들로 파장이 확산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 바 있다. 모이즈 대통령 사퇴까지 시위는 사그라들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외교소식통은 “모이즈 대통령이 시위대의 거센 저항에 일부 요구를 계속 수용하면서 주도권 자체를 상실한 상황”이라며 “불안정한 상황은 계속될 전망”이라고 말했다. 아이티의 한 시민은 가디언에 “우리에게 좋은 지도자가 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