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설왕설래] 말의 진화

항공사에서는 더 이상 ‘스튜어디스’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10년 전에나 사용했다. ‘승무원’이라고 한다. 영어로는 플라이트 어텐던트(flight attendant) 또는 크루(crew)라고 한다. 단어가 지닌 성차별적 요소 때문에 생긴 일이다. 히스토리(History)가 남성 중심의 역사라는 지적이 일면서 허스토리(Herstory)라는 대체어가 생겨났다. 프린세스, 웨이트리스, 액트리스(actress)도 기피어가 되고 있다.

환경이 바뀌면 단어의 운명도 바뀌게 마련이다. 한때 크레파스의 색상 명칭으로 사용되던 ‘살색’이 없어졌다. 중학생들이 ‘연주황’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입에 착 달라붙지 않자 ‘살구색’으로 바뀌었다. 다문화가정이 늘었는데 학교에서 살색을 칠하라고 하면 아이들이 헷갈리지 않겠는가.

언어의 사용 환경을 가장 심하게 바꾼 곳은 SNS이다. ‘즐’이라는 말은 ‘즐겁게’에서 따온 인사말로 사용됐다. 신형 게임이 등장한 뒤 ‘당신과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비아냥거리는 작별인사말로 바뀌었다. 영어 소문자 lol은 ‘빵터짐(laugh out loud)’의 축약형이다. lel이라고 쓰면 비꼬는 투로 ‘웃기네’이다. jelly라고 쓰면 먹는 젤리가 아니라 jealous(질투 나는)의 축약어로 알아듣는다. ‘목마른, 갈증 나는’의 뜻을 가진 thirsty를 SNS 대화창에서 사용하면 오해받기 십상이다. ‘성교하고 싶은’이란 뜻으로 전이됐다.

정치적 환경에 따라서도 특정 단어가 태어났다가 사라진다. 지난 정부 때 비꼬는 말로 유행했던 ‘시월드(시댁), 헬조선’은 현 정부가 들어서면서 사어(死語)가 되다시피했다. 김현철 청와대 경제보좌관이 “헬조선”을 입에 올렸다가 사표를 낼 정도로 거부감이 강하다.

프랑스는 아예 법으로 특정 단어를 죽인다. 프랑스 하원이 학교에서 ‘엄마, 아빠’라는 단어의 사용을 금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대신 부모(parent)1, 부모2로 쓰도록 했다. 동성결혼을 합법화한 뒤 입양아가 받을 상처를 감안한 것. 부모 서열을 따지느냐는 논란이 있지만 무시했다. ‘남자, 여자’가 ‘사람1, 사람2’로 바뀔 날도 멀지 않았다.

한용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