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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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공주 마음의 문 연 듯… 찬란한 문화의 장막 걷혀”

라오스 ‘홍낭시다’ 보존·복원 이끄는 백경환 소장/ 1000년간 돌무더기 폐허로 외면받아 / 2월 금동요니·진단구 등 유물 발굴 / 2013년 시작된 공적개발원조 빛 발해 / 참파삭 유적 지원 한국 리더役 발돋움 / “잊혀졌던 가치 재발견” 감사 인사 봇물

라오스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참파삭 문화경관 내 왓푸사원과 고대 주거지’ 안의 홍낭시다는 크메르제국의 수리야바르만 2세(재위 1113~1150년 무렵)가 최고의 장인을 보내 건축했다는 사원이다. ‘시다 공주의 방’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 사원은 제국의 영광을 증언하는 흔적이겠으나, 조금씩 무너져내려 건축 부재들이 쌓인 돌무지의 폐허로만 오랜 세월 남아 있었다.

라오스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참파삭 문화경관 내 왓푸사원과 고대 주거지’ 안의 홍낭시다 사원은 올해 흩어져 있던 건축부재를 정리해 본격적인 복원작업에 들어갔다. 한국문화재재단 제공

올해 홍낭시다는 부재들을 정리해 제모습을 찾아가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작업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동요니’(힌두교 여신을 상징하는 여근상)를 토해내며 세상에 존재감을 알렸다. 라오스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100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외면을 받았던 시다 공주가 이제 마음의 문을 열고 있는 듯합니다.”

홍낭시다 보존·복원사업을 현장에서 이끌고 있는 한국문화재재단 백경환 소장의 말이다. 그는 “무너진 돌무더기에 갇혀 있던 찬란한 역사를 세상에 선보이는 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공적개발원조(ODA·선진국이 개발도상국의 경제·사회·복지증진을 주목적으로 하는 원조)의 일환으로 2013년 시작된 홍낭시다 복원사업이 또렷한 성과를 내며 먼 옛날 동남아시아를 지배했던 제국의 알려지지 않았던 모습이 한국인에 의해 새롭게 부상한 것이다. 라오스 현장에 있는 백 소장과 지난 10일 메신저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며 유물 출토 당시 상황과 홍낭시다 사원 복원사업의 경과 등에 대해 물었다.

지난달 13일, 퇴적된 흙을 걷어내는 작업을 하던 라오스 현지인부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흙으로 뒤덮여 있었지만 요니는 금빛을 살짝 내비치며 누워 있었다. 시다 공주의 유물은 바로 다음날에도 출토됐다. ‘진단구’(사찰 건물의 기단 아래에 나쁜 기운이 근접하지 못하도록 매장하는 물건)였다.

“2009년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일하면서 미륵사지석탑 해체조사 과정에서 사리장엄을 발견했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미륵사지석탑의 사리공(불탑에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구멍)처럼 홍낭시다 사원을 떠받친 기둥 하부에 구멍을 만들어 진단구를 묻었더라고요.”

구멍을 막은 돌을 조심스럽게 걷어내자 진단구의 금박이 또렷하게 보였다. 백 소장을 비롯해 전유근 박사, 박동희 박사, 조보경 연구원 등 한국 연구진은 금동요니, 진단구 발굴 당시 상황을 촬영해 기록하는 한편 긴급하게 보존처리했다. 백 소장은 “요니, 진단구뿐만 아니라 나가(Naga·뱀의 신 혹은 정령)상도 3기나 발견했고 2017∼18년 무너진 건축 부재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기존에 발견되지 않았던 ‘가네샤’, ‘가루다’, ‘드바라팔라’ 등의 조각상을 발견했다”고 전했다.

홍낭시다 사원 복원 현장의 백경환 소장.

라오스 현지의 반응은 뜨겁다. 금동요니는 라오스에서 처음 발견된 것이고 “고대 크메르 교류사 연구의 핵심자료”라는 평가를 받고 있어 정부와 학계는 물론 일반인들까지 현장을 찾고 있다. 평소보다 10배 이상 방문객이 늘었다고 한다.

“잊혀져 가던 홍낭시다의 가치를 재발견해 줘 감사하다는 인사를 많이 받았고, 한국을 방문한 경험이 있는 정부 관계자들은 미륵사지석탑처럼 홍낭시다를 복원해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금동요니 등의 발굴은 라오스는 물론 한국에서의 관심을 제고한 주목할 만한 성과인 것은 분명하지만 사업의 목표는 유물 발굴이 아니라 “홍낭시다의 지금 상태를 잘 보호하고, 특정 시기의 모습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2013년 사업이 시작되었으나 올해에야 본격적인 복원작업에 들어간 것은 제대로 된 보존·복원을 위해 그간 고증, 지반안정성 연구, 석재보존처리 방안 개발 등의 사전조사와 사원 출입을 위한 교량공사, 진입로 개선 등의 환경구축 작업을 해왔기 때문이다. 돌무더기로만 남아 있던 홍낭시다를 ‘중환자’라고 한다면 병의 원인, 증상을 파악하고 치료법을 탐구해 온 시기였던 셈이다.

“2016년에 지표면 아래 약 1m에 주요 부재와 조각상이 있는 것을 확인한 게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오랜 시간 흙이 쌓이면서 부재들이 묻혀 버린 거죠. 추정만으로 복원하는 걸 지양하고, 원재료의 사용률을 높이기 위해 2년간 작업을 진행해 675개의 부재를 수습했습니다.”

백 소장은 친환경적인 석재보존처리장을 구축하고, 진입로 공사를 벌여 우기만 되면 진흙탕으로 변해 출입조차 불가능했던 상황을 개선한 것을 가장 보람된 일로 꼽았다. 특히 진입로 공사는 사원과 가까운 곳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삶의 터전을 새롭게 하는 효과도 낳아 그들 스스로 유지·관리방안을 내놓았다.

라오스는 홍낭시다를 비롯한 참파삭 지역의 세계적인 유적을 제대로 관리할 사정이 못 된다. 왓푸세계유산사무소를 설치했지만 인력이 대부분 비전공자이고, 정부의 지원도 사무소를 겨우 유지할 정도다. 이 때문에 한국을 비롯해 프랑스, 인도 등이 들어와 유적의 보존, 복원 등을 지원하고 있다.

“이 지역에 들어온 국가들 중에 한국이 막내인 셈인데 이제는 리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콧대 높은 프랑스팀은 우리의 시스템을 벤치마킹하려고 하고, 독불장군이던 인도팀도 가끔 자문을 구합니다.”

홍낭시다 보존·복원사업은 내년에 일단 마무리된다. 일정이 촉박해 사원의 일부는 복원을 하기가 힘들 것으로 보이는 것이 쉬운 대목이기는 하다. 그러나 이후에도 유적 유지 및 관리, 관광자원화, 현지 인력 교육 등은 이어갈 계획이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