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돈, 얼마나 가져야 자유로울까… 얘기해보고 싶었죠”

20일 개봉 영화 ‘돈’ 박누리 감독

올 상반기 영화계에 주목받는 여성 신인 감독들이 있다. ‘말모이’의 엄유나 감독, 다음 달 개봉 예정인 ‘생일’의 이종언 감독이 대표적. 오는 20일 개봉하는 ‘돈’의 박누리(38) 감독도 그중 한 명이다. 박 감독은 ‘더 게임’ 스크립터를 시작으로 ‘부당거래’와 ‘베를린’, ‘남자가 사랑할 때’ 조감독으로 참여하며 내공을 쌓았다.

데뷔작 ‘돈’은 말 그대로 돈에 대한 영화다. 장현도 작가의 동명 소설이 원작. 각본을 직접 쓴 박 감독은 “얼마나 많은 돈이 있어야 돈의 노예가 아닌 삶을 살 수 있을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 보고 싶었다”고 영화의 출발점을 설명했다.

오는 20일 개봉하는 영화 ‘돈’으로 영화계에 김독으로 데뷔하는 박누리 감독. 쇼박스 제공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영화 주인공인 신입 주식 브로커 조일현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영화를 준비하며 돈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된 것.

“돈이 많아야 행복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어요. ‘좋은 영화를 만들겠다’는 꿈을 좇으며 살아왔죠. 당장 월세 걱정만 없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제 꿈은 돈과 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어느 순간 깨달았습니다. 돈은 꿈을 좇는 데 필수불가결하다는 걸요.”

박 감독은 그렇게 일현과 공감대를 형성해 갔다. 2015년 대본을 쓸 때부터 배우 류준열을 일현 역할로 점찍어 뒀다. 류준열은 일현이 변해가는 모습을 완벽히 소화해 냈다. 사실상 원톱 주연을 맡았다.

“준열씨 행보를 눈여겨보고 있었습니다. 그가 나온 작품을 다 봤죠. 어떤 배역이든 실제로 있을 것 같은 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배우라고 생각했어요. 이전 작품들에서 보여 준 얼굴뿐 아니라 보여 주지 못한 얼굴도 보여 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보고 싶었어요. 이 배우가 극한의 상황까지 갔을 때 어떤 얼굴이 나올지 궁금했습니다.”

결과는 만족 그 이상이었다. 류준열에게서 일현이 변하기 전 얼굴이 나오지 않아 촬영을 포기한 장면도 있었다는 후문이다.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금융 중심지인 서울 여의도 한 증권사. 박 감독은 리얼리티와 영화적 재미의 조화와 균형을 고민했다. 대학 선후배들 소개로 주식 브로커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며 꼼꼼히 취재했다.

“바쁜 분들이라 그들이 있는 곳에 가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여의도로 1년여간 출근했죠. 20대 초반에 증권사에서 2개월 정도 아르바이트를 한 적 있어요. 그때는 증권사 분위기를 느끼진 못했습니다. (증권사를 둘러싼) 이런 영화로 데뷔할 줄도 몰랐죠.(웃음)”

큰돈을 다루는 사람들이라 뭔가 다를 거라는 선입견은 여지없이 깨졌다. 박 감독은 “수십 명을 만났는데 똑같은 사람들이었다”며 “다양한 인간 군상을 영화에 반영하려 했다”고 말했다.

서울 중구 23층 오피스 빌딩의 15층 전층을 빌려 세트장을 만들었다. 리얼리티를 살리고 배우나 보조 출연자들이 연기에 몰입하는 데도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오는 20일 개봉하는 영화 ‘돈’의 한 장면. 신입 주식 브로커 조일현(류준열 역)의 뒤에 있는 각국 도시의 시간을 보여주는 시계들은 증권사 사무실이란 공간에 생동감을 주기 위한 영화적 장치다. 쇼박스 제공

그는 “출근길에 건물 입구나 로비, 엘리베이터에서 만나면 ‘부장님 나오셨어요’, ‘과장님 나오셨어요’라며 인사를 나눴다”면서 “직장인 같은 느낌이 들었고 유대감도 생겼다”고 웃었다. 물론 리얼리티보다 영화적 재미를 살려야 했던 부분도 있다.

“증권사 사무실은 영화 속 모습과 달리 좀 조용합니다. 2010년을 기점으로 시스템이 바뀌면서 직통 전화가 사라졌기 때문이죠. 이는 시간의 변화로 보여주려 했어요. 주식 브로커 한 명당 컴퓨터 모니터를 3∼6대 사용합니다. 자리에 앉아 있으면 사람은 보이지 않아요. 영화 속 모습 그대로죠. 다만 전광판과 각국 도시의 시간을 보여주는 시계들을 배치해 생동감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습니다. 또 (2016년 8월1일) 촬영 준비 도중 주식시장 거래 시간이 갑자기 30분 연장됐어요. 고민을 많이 했는데 원래대로 오후 3시로 표현했습니다.”

돈에 대한 영화이지만 돈은 몇 차례 등장하지 않는다. 컴퓨터 모니터나 전광판의 숫자로 보일 뿐이다. “영화에서 수천만 원, 수억 원이 주식 브로커들의 마우스 클릭 한 번에 움직이잖아요. 어떻게 보면 허상처럼 느껴질 수 있죠. 배우들도 저도 ‘손가락의 무게’를 느꼈습니다. 마우스를 한 번 클릭하는 연기도 새로웠어요.”

박 감독은 일현처럼 한 인물의 변화와 성장, 그 과정에 관심이 많다. 그는 “아직 류준열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며 “차기작은 또 어떤 인물을 탐구하는 데에서 시작하게 될 것 같다”고 했다.

 

박진영 기자 jyp@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