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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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제주의 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은둔의 시간

김운하, 장편소설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않는다’ 펴내

‘제주도 서귀포시 성산읍 신산리의 한적한 바닷가 마을. 비가 내리는 날, 혹은 깊은 밤 주인공은 바닷가를 배회하며 사색에 잠긴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펼쳐지는 자기 은둔의 시간은 도시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어본다. 주인공은 완전한 고립 속에서 자기 자신과 대면하고 치유의 시간을 가진다. 태고의 풍경을 간직한 산굼부리… 아름다운 자연이 고독한 타자를 감싼다.’

젊은 소설가이자 인문학자인 김운하가 정말 오랜만에 장편을 냈다. 신인 작가로선 드물게 선풍을 몰고왔던 ‘137개의 미로카드’ 이후 18년 만에 소설을 탈고한 것이다. 소설가로서 인문학자로서 축적한 사유들을 응축해냈다.

소설은 10여년 전 홀연히 제주로 떠난 일을 회상하는 ‘나’로부터 시작한다. 작가는 제주로 가는 길에 열 권의 책을 들고 갔다. 노자와 장자, 우파니샤드, 호메로스와 그리스 비극 작가들, 스피노자와 카프카…. 작가의 말이다.

“이 소설을 구상한 건 10여 년 전이었어요. 제주도에서 1년 가까이 사색할 시간을 가졌지요. 인생에서 처음으로 갖는 휴식 기간 같은 거였어요. 아무 일도 안 하고 바닷가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서 책 읽고, 쉬고, 산책하고, 그런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여러 가지 많은 걸 깨닫게 되었어요.” 당시 고전을 들고 간 건, 번민이 많을수록 원전에 충실해야 한다는 인문학자로서의 깨달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설에서 작가 자신인 ‘나’는 “글쓰기가 이끄는 사색을 통해서만 비로소 운명에 대한 직관에 도달했다”고 고백한다.

고전에서 얻은 삶의 고민은 다양하다. 이를테면 이런 것들이다.

“헬라스의 호메로스 시대에 운명은 인간의 바깥에서, 올림푸스 산에 살고 있는 신들에게서 내려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겪었던 죽음들을 떠올린다. 그때마다 상주가 되어 붉은 흙으로 덮인 무덤 앞에 서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느닷없이 유죄를 선고받고 기소당한 카프카 소설 ‘소송’의 주인공 K가 되었다. 이어 오이디푸스를 떠올린다. 오이디푸스는 지성적인 동물인 인간, 특히 지식인들의 자부심과 위험, 한계를 상징하는 비유로 인용된다. 진리의 파수꾼임을 자처하는 철학자들, 이념가들, 맹신자들을 떠올린다.”

김운하 작가에게 있어 이 시기는 의미 있는 전환의 포인트였다. 이전의 인생과는 완전히 단절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단계였기 때문이다. 과거를 정리하고, 새로운 계획도 세워야 했다. 작가로서의 삶을 받아들이는 시기였다. 운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가 화두였으며 ‘운명’이라는 주제가 소설에 녹아들었다.

“나르키소스는 호수의 수면에 비친 자기 모습과 사랑에 빠졌다. 예술가들은 물거울에서 세계의 고뇌를 보는 자, 거울에 비친 환영을 꿈으로 꾸는 자, 혹은 자신이 세계의 거울임을 깨닫는 자들이다. 그것이 바로 예술가들의 운명인 것을….”

문학 평론가 임지연이 내놓은 서평이다.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며 천천히 한낮의 명료함에서 밤의 모호함으로 발을 옮겨 놓는다. 그리고 온몸으로 느낄 것이다. 우연과 서사가 빚어내는 숨겨진 삶의 촉수를, 결코 손으로 그러쥘 수 없는 근원의 부스러기들을, 책들의 지도 없는 여행을,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깊은 사랑을….”

김운하 작가는 “한반도의 좁은 땅덩어리에서 유일하게 은둔과 도피가 가능한, ‘먼 곳’으로 여겨지는 제주를 사람들은 사랑하고, 일상을 떠나 숨을 수 있다. 제주가 있어 다행”이라고 했다. 월간토마토 제공

자유롭게 써 내려간 소설이기에, 거기서 무엇을 읽어 내느냐도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각 에피소드 속에서 자신과 만나는 순간순간으로 채워진 이 소설은 각자 자신의 운명 속에서 자기 자신이 어디쯤, 어떤 지점에 서 있고 내 삶에서 의미 있게 생각하는 건 무엇인지,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생각할 수 있게 해 준다.

1964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난 김 작가는 서울대 신문학과를 거쳐 미국 뉴욕대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한 이후 1995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통해 소설가로 나섰다. 떠오르는 젊은 작가로 주목받고 있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