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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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연국칼럼] 대한민국 체제유지 가능한가

손쉬운 회피 전략을 선택하면 / 위험 발생 시 존망의 위기 맞아 / 평화 거론하려면 핵 제거가 먼저 / 눈도 깜빡이지 않고 北 지켜봐야

위험을 대하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현실 직시와 현실 회피이다. 전자를 위해선 사물을 똑바로 볼 수 있는 눈과 담대한 용기, 그리고 많은 비용이 요구된다. 위험에 대비해 성을 쌓고, 군사력을 키우고, 국민의 정신도 무장돼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런 인적·물적 부담을 가급적 피하려 한다. 눈앞에 닥친 위험이 아니라면 “괜찮겠지”라는 식으로 외면한다. 위험에서 일단 고개를 돌리면 비용이 들지 않고 심리적 안정을 꾀할 수 있다. 회피 방식이 대중들에게 인기를 얻는 이유이다. 그러나 설마가 현실이 되면 국가는 존망의 위기를 맞는다. 사람은 도망이라도 칠 수 있지만 국가는 달아날 곳도 없다. 생존을 위한 남은 선택지는 굴종뿐이다.

배연국 논설위원

요즘 집권층의 북핵 대응을 보고 뇌리에 떠오른 것이 후자의 위험 회피 방식이다. 지난번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 후에 나온 청와대의 첫 반응은 “과거 어느 때보다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북이 영변 외에 다른 핵시설들을 숨기고 있는데도 “영변 핵시설이 폐기된다면 비핵화가 불가역적”이라고 단언했다. 위험에 눈을 돌리는 회피의 시작이다. 통일장관을 지낸 인사는 비밀 핵시설을 거론한 우방국 관리를 조롱하고, 진보세력들은 김정은을 평화의 위인으로 추켜세운다. 회피의 종착지인 굴종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굴종도 생존의 방편일 순 있지만 근본 맹점이 있다. 나라의 존망이 적의 자비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점이다. 청 태종이 침략하자 조선은 청을 황제의 나라로 받들고 다행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반면 남송의 황제는 금 태종에게 황금과 땅을 바치고 큰아버지로 받들었지만 얼마 후 온 나라가 초토화되고 말았다. 김정은의 자비심은 청 태종일까, 금 태종일까? 그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이복형과 고모부를 잔인하게 살해했다. 피붙이까지 죽이는 무자비한 살인자에게 남녘 동포를 위한 평화의 자비가 남아 있을까.

집권층 일각에선 북한에 체제보장만 해주면 마치 핵을 포기할 수 있는 것처럼 떠벌린다. 청맹과니식 현실 인식이다. 북한에는 정권을 지탱하는 두 기둥이 있다. 하나는 강성대국의 열매인 핵무기이고, 다른 하나는 수령 중심의 주체사상이다. 최악의 인권탄압과 빈곤은 그 결과물이다. 이런 어둠의 지옥이 광명의 천국과 담을 맞대고 공존할 수 있을까.

남북의 체제는 자석의 N극과 S극처럼 서로 밀어내는 속성을 띠고 있어 양립이 불가능하다. 주민들의 끼니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북한에는 남한의 풍요 자체가 체제 위협이다. 거짓으로 쌓은 북쪽의 바벨탑은 남쪽의 진실이 흘러들면 단번에 무너진다. 김정은은 그것을 막기 위해 주민들을 감시하고, 남녘을 불바다로 만들 핵 버튼을 자기 책상 위에 올려놓고 있다.

인도를 여행하면 길거리에서 코브라가 피리 소리에 맞춰 춤을 추는 광경을 볼 수 있다. 무시무시한 코브라를 보면 오싹함을 느낄 테지만 그럴 필요가 없다. 관광객들이 안전하게 공연을 즐길 수 있도록 미리 뱀의 독니를 뽑아버렸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북의 ‘평화 쇼’가 안전성을 담보하려면 핵의 독니가 먼저 제거돼야 한다. 핵과 평화는 병존할 수 없다. 더구나 핵은 치사율 75%인 코브라의 독보다 독성이 강하다. 수백만 명을 치사율 100%로 내몰 수 있다.

국가안보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둬야 한다. 적의 선의를 믿다 사태가 터지면 대응수단을 확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안보에서 대응수단의 상실은 망국을 의미한다. 이런 이치를 아는 국가지도자라면 “김 위원장이 핵을 포기할 진정성을 갖고 있다”는 말을 예사로 해선 안 된다.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일전에 “눈도 깜빡이지 않고 북한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지도층에게선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현실 직시’의 죽비소리다. 북의 도발을 감시할 첩보위성 하나 없는 나라에서 지도층마저 거짓 평화의 눈가리개로 국민의 이목을 가리고 있다. 정말 우리가 걱정할 것은 북한 체제의 유지가 아니다. 자유번영의 대한민국 체제가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느냐 여부다.

 

배연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