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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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영·위선 가득한 19세기 英에 투영된 한국사회

산업혁명으로 하급시민도 부 축적 / 낭만주의의 허식·영웅숭배 대세돼 / 당시 누구도 시도 못했던 세태 고발 / 특유의 섬세한 인간 묘사 눈길 끌어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 지음/서정은 옮김/웅진지식하우스/1만3800원

허영의 시장 1, 2 전 2권/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 지음/서정은 옮김/웅진지식하우스/1만3800원

 

19세기 빅토리아 시대 잉글랜드는 ‘해가 지지않는’ 나라였다. 전세계 식민지로부터 진귀한 물품과 돈이 몰려든 런던은 오늘날 뉴욕보다 훨씬 더 번창한 세계 도시의 중심이었다. 그 영국의 번영 뒤에는 온갖 인간 군상들의 추악한 모습도 내재되어 있었다. 자본주의의 번영 만큼이나 뒤에 감춰진 그늘 또한 깊다고나 할까. 오늘날 빈부 격차를 초래한 신자유주의의 싹이 영국에서 배태되고 있었다. 당대 런던의 문필가들은 이같은 겉과 속이 다른 잉글랜드의 모습을 글과 연극 등으로 풍자했다.

 

소설은 이런 시대적인 배경 속에서 나왔다. 작가 윌리엄 새커리(William Makepeace Thackeray· 1811∼1863)는 이 작품으로 단번에 세계적인 문학가 반열에 올랐다. 그는 부와 명예는 물론 19세기 영문학에 큰 족적을 남겼지만, 정작 본인의 삶은 순탄치않았다.     

 

당대 문필가 서머싯 몸은 이 작품을 최고의 영문소설로 꼽았고, 샬럿 브론테는 이 작품에 압도되어 그의 소설 ‘제인 에어’를 새커리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20세기 들어서도 옥스퍼드대 석좌교수 존 캐리는 영어로 쓰인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고 격찬했다. 그렇다면 이 작품에 이토록 찬사가 쏟아진 배경은 무엇인가. 

 

새커리의 소설은 지금도 인간성 묘사에 관한 고전 반열에 오를 만큼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다. 사진은 당시 런던 거리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19세기 영국 사회는 산업혁명으로 인한 상공업이 발달하고 중산계급이 급성장했다. 하급 시민들도 부의 축적과 신분 상승의 욕망으로 생의 의미를 찾았다. 엄청난 돈이 몰리면서 낭만주의의 허식과 영웅 숭배가 대세였다. 새커리는 이런 영국 사회를 정면으로 거스른다. 특유의 관찰력과 역사의식으로 사회를 비판하면서, 인간 본성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작가는 당시 영국 사회를 “개개인은 ‘허영의 시장’에 늘어서 있는 임시 건물과도 같다”고 했다. 그러면서 상류사회의 허영과 위선 즉, 비뚤어진 속물 자본주의 사회를 꼬집는다.

 

이 책의 제목인 ‘허영의 시장’은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에서 가져왔다. 천로역정의 줄거리는 이렇다. 천상으로 가는 순롓길 중 주인공은 ‘허영’이라는 도시를 지나간다. 거기에서 만나는 휘황찬란한 ‘시장’은 인간의 탐심과 욕망을 드러내는 물건들로 가득찬다. 소설의 주제로 안성맞춤이었다. 새커리는 후기에서 “이 제목을 한밤중에 떠올리고는 기쁨에 넘쳤다”고 고백했다.

 

소설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하지만 특유의 섬세한 인간 묘사는 누구도 흉내낼 수 없었다. 소설은 가난한 고아 레베카와 유복한 상인 집안에서 자란 아멜리아의 정반대 삶과 그들의 운명에 얽혀 있는 다양한 인물의 행적을 따라가면서 전개된다. 작가는 풍자와 조소, 연민의 대상이 되다가 서로 얽히고설키면서 흥미진진한 사건 속으로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이 소설은 ‘반영웅 소설- 주인공 없는 소설’의 선구자로 인용된다. 당시 영국 평단에서는 “유럽 낭만주의에 대한 반동을 보여주는 작품이기에 반영웅 소설의 선구자”라면서, “유럽의 사실주의 문학을 가름하는 이정표”라고 했다.

 

소설에서는 일부 빠진 부분도 엿보인다. 줄곧 잘못된 당시 세태를 비판만 했지, 대안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국의 한 평자는 “사람이 마땅히 어떠해야 하고, 사회가 어떠해야 한다는 이상적인 모습을 그리지 못하는 한계가 있기에, 비꼬기와 풍자에 그칠 수밖에 없다”고 했다. 또다른 평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기 위해 이웃을 사랑하라는 ‘미약한 도덕’은, 사람의 일을 신에게 떠넘기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그럼에도 새커리는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세태를 고발하는 용기를 지녔다. 당대 어느 소설가보다 삶의 진실을 독자들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했다는 평을 듣는다.

 

새커리가 이 소설을 쓴 데는 불행한 인생과도 연관이 있다. 그는 인도 콜카타 동인도회사 관리자였던 아버지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죽자 런던으로 보내져 명문 케임브리지대학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으나 학위를 받지 못하고 중퇴했다. 잡지사 또는 신문사 기자로 생계를 이어가다 아일랜드 출신 여성과 결혼했으나 순탄치 못했고, 영국 사회는 그를 냉대한다. 이런 우여곡절의 삶은 작품을 구상하는 모티브를 제공한다. 빅토리아 시대 영국 사회를 신랄하게 풍자하는 새커리의 특징적인 문체는 이런 배경에서 만들어졌다.

 

정승욱 선임기자 jswoo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