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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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이미 자유언론 맹아 있었다

조맹기·조은숙 ‘남명 조식, 내암 정인홍의 레토릭 사상’ 공저

원로 언론학자인 조맹기 서강대 언론대학원 명예교수가 ‘남명 조식, 내암 정인홍의 레토릭 사상’(시간의물레)을 펴냈다. 우리나라 근현대 언론인의 원류로 꼽는 조선조 실학자들의 공론, 즉 언론자유의 뿌리에 천착했다.

 

책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 남명(南冥) 조식(1501∼1572)과 그의 제자 내암(來庵) 정인홍(1535∼1623)이 쓴 상소문을 중심으로 설득 커뮤니케이션 관점에서 그들의 레토릭(수사학)에 담긴 사상을 밝힌 연구서다. 고려대 언론대학원에 재작중인 남명의 후손 조은숙(극동방송 음악 진행자)씨가 공동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퇴임 이후 더욱 왕성한 연구와 집필 활동을 하는 조 명예교수는 서구의 레토식 사상을 근간으로 하는 개인주의 사회가 도래하고, 그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남명과 내암의 학문과 실천을 깊이 있게 파헤쳤다.

 

조선의 명종, 선조, 광해군 때는 이론의 르네상스시기를 맞이했다. 서구의 출판 문화가 막 유입되는 시기였다. 민간 조보가 등장하고 백성들은 먹고 살기 위해 체제를 거부하고 있었다. 그때 남명과 내암이 등장했다.

 

남명은 재야 지식인으로 중앙 정치에 참여하지 않았으면서도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언어 능력이 뛰어났던 남명은 상소로 당대 사회·정치 문제를 꿰뚫으며 사림 사회에 큰 충격을 줬다. 내암은 이론에 해박한 스승의 언어를 제도권 안에서 현실 정치에 적용시켰다.

 

남명은 언어 선택에서 감정을 철저히 차단함으로써 감정 전체를 표출하는 현대인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내암은 스승의 이름을 알리는 데 힘쓰며 임진왜란 후 대사헌으로서 국정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 상소를 올린다. 두 사람은 조선 중기 당쟁 속에서도 경(敬), 의(義), 성(誠)의 가치를 통해 공론을 일으키고자 했다. 현대식으로 풀이하면, 명징한 칼럼으로 정치인들을 훈계한 셈이다.

 

성리학이 지배하는 신분사회에서 다른 형태의 레토릭 학문세계가 긴장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이를 수용하는 지식인 사회는 긴장했고, 사회는 변동의 도가니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패거리 사회에서 개인주의 사회로 급속히 전진하고 있었다.

 

극기만으로 개인의 자유와 독립을 구가할 수 있었다. 이 사회는 공론을 말할 수 있었고, 자유주의 시장경제의 원류를 말할 수 있었다. 패거리 언론, 나팔수 언론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다. 경, 의, 성을 통해 개인과 국가는 과거, 현재, 미래를 엮게 된다.

남명 조식과 내암 정인홍의 상소문을 중심으로 조선 중기 자유언론의 맹아를 천착한 조맹기 서강대 언론대학원 명예교수. 오른쪽은 조맹기·조은숙 공저 ‘남명 조식, 내암 정인홍의 레토릭 사상’ 표지.

저자는 조식, 정인홍, 이이, 정약용, 서재필, 장지연, 안재홍, 천관우, 그리고 현대 언론인의 경세학(經世學), 즉 레토리션으로 엮는다. 즉, 내적 커뮤니케이션과 매스 컴퓨니케이션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계가 된다. 내적 커뮤니케이션은 마음을 연구하는 것이고, 매스 커뮤니케이션은 신문, 방송 등 기술을 매개로 콘텐츠를 증폭시킨 것이다.

 

인터넷을 통한 지구촌의 형성은 융합적 미디어의 경향을 더욱 두드러지게 표출시킨다. 다른 말로 현대 ‘독립신문’ 연구만으로 현대 언론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없게 된다. 그 원류는 더욱 오래 전에 발아했다는 측면이다. 이 현상들은 외세에 의한 역사의 단절된 삶을 영위함으로써 어떤 연관성도 없는 것처럼 따로따로 삶을 영위했으나, 실제 그렇지 않은 역사의 흐름이었다.

 

초심으로 돌아가면 ‘경(經)’은 유교의 경전을 이야기하고, ‘세(世)’는 세상에서의 삶을 이야기한다. 합쳐서 경세학은 사회정책론이다. 이성규는 “경(經)〔이념〕을 역사〔史〕에 붙여 경사(經史)”라고 했다. 사(史)는 계속 바뀌는 것이고, 경(經)은 별로 바뀌지 않는다. 이 둘이 합치면 국가운영원리, 즉 사회정책론이 된다.

 

남명은 관직을 갖지 않았으나, 경세론으로 ‘을묘년에 사직하는 상소문(乙卯辭職疏)’(1555, 명종 10년)을 비롯하여 3개의 상소문이 있고, 내암은 ‘사영천군봉사(辭永川郡奉事)’(1578년, 선조11년)를 시작으로 많은 상소문(上疏文), 차자(箚子) 등을 남겼다. 더욱이 ‘내암집’에는 기존의 문집과는 달리 시문이나 학문의 이론에 대한 입장을 밝힌 글보다는 상소문이나 봉사 등 정인홍의 정치적 입장을 밝힌 글이 주류를 차지하고 있다.

 

내암은 장령, 대사헌 등 제도권 언론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다. 상소가 많을 수밖에 없다. ‘내암집①’은 “장령, 대사헌 등 감찰직을 수행할 때는 철저한 엄격성을 보였으며, 당쟁 시에는 반대 정파에 대해 적극적인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라고 했다.

 

한편, 인조반정이 1623년 일어나면서 사림이 득세한 시기는 지나갔다. 즉, 은일의 사대부는 인조반정을 기해 남명과 내암이 속한 북인의 사림이 속한 신분 집단의 근거를 자체를 잘라버렸다. 그러나 동강(東岡) 김우웅(1540~1603), 미수 허목(許穆, 1595~1682), 성호(星湖) 이익(李瀷, 1681~1763),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 1622~1673),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 실학자들이 그들의 학문을 전승했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