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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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애국하는 기사, 매국하는 기사?

스포츠에서 국가대표팀 취재를 할 때 한국 기자라면 어느 회사를 막론하고 우리나라가 이기길 바란다. 설령 외신 기자일지라도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기사에 티를 낼 수 없지만 그 마음은 매한가지다. 하지만 우리 대표팀이라고 항상 응원만 할 수는 없다. 기자가 응원단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표팀이 못할 때는 따끔히 지적해야 하는 게 기자의 본령이다. 전력 노출이 우려되더라도 국민의 알 권리가 우선이라고 판단되면 기사로 써야 한다. 그럼 이 행위는 매국일까.

최근 정치권에서는 애국·매국 기사로 논쟁이 뜨겁다. 지난해 9월 미국 블룸버그통신은 기사 제목에 ‘문재인 대통령이 유엔(국제연합)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수석대변인 역할을 한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던 이 기사는 자유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가 최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한 번 더 인용해 정쟁의 한가운데에 섰다.

최형창 정치부 기자

더불어민주당은 “미국 국적 통신사의 외피를 쓰고 국가원수를 모욕한 매국에 가까운 내용”이라고 비판했다. 민주당은 이튿날 문 대통령을 ‘김정은 에이전트’라고 쓴 뉴욕타임스(NYT) 한국인 주재 기자까지 “검은 머리 외신”이라고 묶어서 비꼬았다. 해당 논평을 낸 대변인이 일부 거친 표현에 대해 사과를 하면서 일단락됐지만 아쉬움은 여전히 남는다.

민주당이 비판한 NYT 한국인 주재 기자는 1999년 AP통신에서 근무할 때 6·25전쟁 당시 미군들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당한 ‘노근리사건’을 1년에 걸쳐 취재했다. 기사를 통해 당시 사건과 반세기 넘는 희생자, 유가족들의 고통을 국내외에 알렸다. 그 기자는 이 기사로 미국에서 가장 권위 있는 보도상인 퓰리처상의 한국인 최초 수상자가 됐다. 이뿐 아니라 한국인 외신기자들은 우리 현대사의 주요 대목에서 족적을 남겼다. 1987년 6월 9일 최루탄에 맞아 머리에 피를 흘리고 있는 이한열 열사의 모습을 담은 건 당시 로이터통신의 한국인 사진기자였다. 이 사진은 6월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국내나 해외 모두 언론은 권력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이 때문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자국 일부 언론과 관계가 불편하다. 그러나 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것이 기자 정신이다. 칭찬이나 응원은 국가 자체 홍보망으로도 충분하다. SNS 발달로 권력집단과 국민이 직접 소통하는 시대이지만 그럼에도 언론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먼저 알리는 권력집단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기사를 두고 애국과 매국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 언론사는 각자 편집방향이 있다. 회사·기자마다 시각은 다르지만 결국 국가나 우리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가길 바라는 마음에서 쓰는 건 같다. 내 편이 아니면 다 매국일까. 권력을 향한 언론의 비판이 조금 불편할 수는 있다. 최근 만난 서울 주재 한 외신 기자는 “그래도 이번 정부는 박근혜 정부와 달리 외신기자를 고소한 건 아니지 않은가. 그 점만으로 감사해야 하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며 씁쓸해했다. 민주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민주당이 언론의 비판적 시각에 ‘매국’이라고까지 표현하는 것이 과거 권위주의 정권의 태도를 답습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다.

 

최형창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