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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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기미상궁

조선시대에 임금 수라상 음식을 사전에 맛보고 검식했던 이를 기미상궁이라 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독재자들은 정적의 독살기도를 막기 위해 일종의 기미상궁을 두곤 했다. “우리에게 쌀과 국수, 후추, 완두콩, 양배추 등이 주어졌죠. 음식을 모두 먹은 다음 1시간을 기다렸고 그때마다 몸에 이상이 생길지 몰라 불안했습니다.” 나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의 기미상궁이던 마르고트 뵐크의 회고담이다. 영국의 독살 기도설에 불안감을 느낀 히틀러는 15명의 기미상궁을 두었다. 뵐크는 “식사 후 살아 있다는 것이 기뻐서 개처럼 울곤 했다”고 말했다. 늘 죽음의 공포 속에서 살아야 하니 이런 3D 업종도 없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크레믈에서 식사할 때 음식에 독이 들어 있는지 판별하기 위해 보안요원을 입회시킨다고 한다. 해외 순방 때도 소금, 후추, 소스, 물 등을 챙겨 간다. 영국 언론은 “말레이시아 항공기 피격으로 국제적 비난을 받는 푸틴은 ‘폴로늄(인명살상용 방사능물질)이 들어간 샌드위치’를 먹고 싶지 않아서라도 보안요원을 데리고 다닐 것”이라고 꼬집었다.

로마의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할로투스라는 기미상궁이 있었는데도 버섯요리를 먹고 독살당했다. 그런데 할로투스는 살아남아 후임인 네로황제의 기미상궁 역할을 했다. 네로 측에 매수돼 클라우디우스를 독살했다고 의심받는 이유다. 기미상궁이 권력자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13세기 이집트의 노예병사 이즈 알딘 아이바크는 술탄의 검식관에서 장군으로 신분이 상승된 뒤 끝내 술탄 자리까지 오른 인생역전의 주인공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2월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 때 기미상궁을 데려갔다고 한다. 소피텔메트로폴 호텔의 총괄조리장은 “김 위원장이 식사하기 1시간 전쯤 수행원들이 음식들을 일일이 맛보며 검식을 했다”고 했다. 기미상궁은 권력자가 먹을 최고급 음식을 시식할 수 있는 ‘특권’이 있지만 잘못되면 대신 죽을 수도 있다. 김 위원장을 노리는 반북 활동이 노골화하는 요즈음이다. 김 위원장의 불안감이야 당연하겠지만 기미상궁들의 공포감도 덩달아 커질 것이니 안타까울 따름이다.

김환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