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만난세상] ‘직권남용의 남용’ 시대

“기왕 이렇게 된 거 ‘임진왜란 특별법’ 같은 걸 만들자고 하자. 이순신 제독을 ‘백의종군’에 처한 선조는 ‘직권남용’으로 처단하고, 인조는 반정으로 즉위했으니 ‘내란죄’를 적용할 수 있겠다. 비록 공소시효는 지났지만 수사를 통해 ‘진실’을 밝혀내는 일이 중요하니까.”

얼마 전 이런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았다.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는 ‘별장 성접대 의혹 사건’ 수사를 위한 특별수사단이 출범한 것이 계기가 됐다. 김 전 차관이 5년 만에 수사선상에 오른 것은 일찌감치 예정된 수순이었다. 원래 검찰은 ‘권력’이 시키면 따르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권력은 살아 있어야 한다.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이 재직 시절 부하 법관들에게 강조했다는 ‘KKSS’(까라면 까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한다)정신은 실은 검찰의 DNA에 더 잘 어울린다고 봐도 무방하다.

배민영 사회부 기자

이 사건 수사는 과거 두 차례 진행돼 ‘혐의없음’으로 결론난 데 이어 항고와 재정신청이 기각된 바 있다. 하지만 문무일 검찰총장이 지난 9일 “검찰이 제때 진상을 규명하지 못했다”며 사실상 과거 수사를 ‘부실수사’로 규정함에 따라 수사단은 김 전 차관에게 걸린 혐의 입증을 위해 앞만 보고 달릴 수밖에 없게 됐다.

그런데 검찰 내부에서는 이번 수사가 겨눈 대상이 김 전 차관이 아닌 곽상도 전 청와대 민정수석(현 자유한국당 의원)이라는 말이 파다하다. 한 검찰 간부는 “김 전 차관은 수사 대상에 안 넣을 수 없어서 곁다리로 끼워 넣은 것”이라며 “진짜 ‘타깃’은 곽 전 수석이라고 본다”고 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검찰은 또 한 번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는 셈이 된다.

곽 전 수석에게 걸린 혐의는 김 전 차관 사건을 들여다보던 경찰 수사지휘라인을 부당하게 인사조치했다는 등의 ‘직권남용’이다. 문재인정부 들어 지난 정부 관계자들에 대한 처벌을 위해 ‘전가의 보도’처럼 활용되는 죄명이다. 검사 출신의 한 중견 변호사는 “직권남용이 너무 남용되는 것 아니냐”고 우려했다.

직권남용죄에서 관건은 공무원이 가진 ‘직권’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수 있느냐이다. 설령 해당 공무원이 가진 직권 범위 밖에 있는 행위로 다른 사람에게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했어도 직권남용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당사자인 곽 전 수석은 결백을 주장한다. 법무부 검찰과거사위원회로부터 수사 권고를 받은 수사단이 여태 곽 전 수석을 피의자로 입건하지 못한 채 끙끙대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수사단은 곽 전 수석을 ‘피수사권고대상자’라는 애매한 신분으로 분류한 상태다. ‘KKSS’도 무작정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시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자. 세종은 1447년 직권남용죄를 물어 병조판서 이선을 파직했다. 지방관 시절 나랏돈으로 산 도자기를 자신이 챙기고, 일부 백성에게 뒷돈을 받는 대가로 세금 징수대상에서 빼줬는가 하면 무녀와 간통을 했다는 혐의였다. 당시 사헌부는 이선의 모든 혐의에 대해 죄를 물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세종은 “사면 이후의 일은 모두 묻지 말라”며 도자기를 챙긴 죄만 묻게 했다. 풍문만으로 죄를 물어서는 안 된다고도 했다. 600년 전에도 수사기관의 공정성과 공소권·시효 문제 등은 이처럼 엄격하게 지켜졌다.

 

배민영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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