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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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손의 부활

인류 문명의 발전은 손의 해방에서 시작됐다. 300만년 전 인류는 직립보행에 성공한다. 그때 두 손은 땅바닥에서 벗어나 자유의 기쁨을 누렸다. 손을 자유롭게 쓰면서 도구의 제작이 가능해졌다. ‘도구적 인간’ 호모 파베르의 등장이다.

손의 활동성은 뇌를 자극해 인간의 진화를 촉진했다. 인간은 자동차를 만들어 치타보다 빨리 달렸고, 비행기를 만들어 독수리보다 높이 날았다. 망원경과 현미경의 발명을 통해 지상에서 가장 밝은 눈을 가질 수 있었다. 마침내 인공위성을 띄워 지구별의 주인이 됐다. 모두 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면서 벌어진 현상이다.

진화의 일등공신인 손은 요즘 뒷전으로 밀려난 신세다. 가장 기초적인 손 글씨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다. 학생들에게 손으로 글씨를 쓰라고 하면 추상화가 따로 없다. 교수들이 시험 답안지를 채점하려면 글자 해독부터 해야 할 판이다. 어릴 적부터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컴퓨터 자판으로 글자를 치다 보니 손의 기능은 퇴화되고 말았다. 머잖아 그마저 사라질 모양이다. 말만 하면 인공지능이 척척 알아서 해주는 시대가 다가온다. 자율주행차가 보급되면 운전대를 잡을 일이 없고, 청소와 요리도 로봇이 대신해준다. 손이 필요 없는 세상이 도래하는 셈이다.

퇴장하던 손이 부활을 선언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KB국민은행이 손바닥으로 돈을 찾는 서비스를 오늘 50개 점포에서 처음 시행한다고 한다. 미리 수집한 ‘손바닥 정맥’ 정보로 본인 여부를 확인해 비밀번호나 통장, 인감 없이 예금을 지급하는 서비스다. 한 번만 등록하면 거래 금액이나 횟수에 제한 없이 출금이 가능하다. 통장 분실 신고나 신분증 대조 등의 창구업무가 줄고, 비밀번호를 자주 잊는 고령층엔 희소식이 될 것이다. 윤종규 KB금융그룹 회장은 “미래의 금융회사가 나아갈 방향성을 제시하는 마중물이 될 것”이라고 했다.

‘나의 두 손으로 무엇을 할 것이냐?’ 도구적 인간이 직면한 숙명적인 질문이다. 자신의 손으로 ‘소중한 무엇’을 축적해두지 않으면 훗날 아무리 손바닥으로 인증하더라도 인출할 게 없을 것이다. 비단 은행 통장뿐이겠는가. 우리 삶 역시 그렇다.

배연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