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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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부자 좌파

생활수준은 상류층이지만 입으로는 좌파 성향을 드러내는 이들은 어느 나라에나 있다. ‘캐비아 좌파’는 부자 좌파를 비꼬는 프랑스식 표현이다. 고급 요리인 캐비아(철갑상어 알)를 먹으면서 사회주의를 논하는 이중적 좌파를 의미한다. 1980년대 프랑스에서 사회당 미테랑 정부를 비난하는 용어로 처음 쓰였다. 왜 하필 캐비아일까. 파리의 유명 식당에서 캐비아를 맛보려면 알 종류에 따라 1인분에 100여만원을 줘야 한다. 몇 스푼이면 없어지는 아주 적은 양인데도 그렇다.

미국에서는 ‘리무진 리버럴’로 불린다. 리무진을 타고 다닐 정도로 부유한 생활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위한다고 말하는 이들을 비아냥대는 용어다. 1969년 뉴욕시장 선거 때 한 민주당 공천 희망자가 경쟁자와 그를 지지하는 맨해튼 부자들을 비난하며 처음 사용했다. 영국에서는 런던 북부 부촌 햄스테드 주민들이 진보성향 노동당에 표를 몰아주자 보수주의자들이 ‘햄스테드 리버럴’이라고 비꼬았다.

한국에는 강남 좌파가 있다. 여기에서 강남은 거주지가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생활수준을 향유하는 계층을 말한다. 손호철 교수는 “강남 좌파의 원조는 카를 마르크스”라고 단언한다. 한국 사회주의의 원조도 일본 유학을 다녀온 부유한 지주계층이었고 민주화·진보운동을 주도한 것도 YS(김영삼), 학출(학생운동 출신 노동운동가들) 등 강남 좌파였다고 했다. 따라서 강남 좌파가 갑자기 생겨난 새로운 현상인 것처럼 호들갑을 떨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말한다.

입만 열면 미국 백만장자들을 향해 날을 세우던 버니 샌더스 미국 상원의원이 연간 100만달러를 버는 백만장자로 드러났다. 샌더스는 자본주의와 빈부격차를 비판해온 자칭 민주적 사회주의자다. “리무진 리버럴의 위선”이란 비판이 뒤따랐다. 금력에다 권력까지 거머쥔 부자 좌파에 대한 시선은 따듯하지만은 않다. 그렇지만 약자들을 위한 기부와 봉사를 생활화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존경과 신뢰를 받는 부자 좌파가 많아질수록 양극화 갈등은 줄어들고 국민통합은 가속화할 것이다. 부자 좌파가 많은 사회는 부자만 많은 사회보다 훨씬 건강하다.

 

김환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