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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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규칼럼] 국회가 의회주의 말할 자격 있나

4월 임시국회 문만 열어놓고 / 여야 ‘발목잡기’ ‘독선’ 공방 / 입법활동은 뒷전으로 미루고 / 2020년 총선에만 관심 쏟아

20대 국회 임기가 1년도 채 안 남았다. 실제 일할 수 있는 기간은 고작 열달 남짓이다. 그런데도 정상 가동되지 않는다. 3월 임시국회가 아무 성과 없이 끝나더니 4월 임시국회는 문만 열어놓은 상태에서 의사일정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인사청문회 외엔 두드러진 활동이 없다. 4월 국회가 빈손으로 끝날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여야가 벌써부터 내년 총선만 염두에 두고 있으니 그럴 가능성이 적지 않다.

여야는 사사건건 대립하면서 국회 활동을 팽개치다시피 했다. 여권은 고위공직자 임명 강행 등 밀어붙이기 일색이다. 야당은 ‘결사의 각오’를 다지며 극렬하게 반대하지만 메아리 없는 외침이다. 여야는 상대방에 대해 ‘발목잡기’, ‘독선’이라고 비난하면서 막말을 주고받는다. 그 와중에 대화와 협상이 실종됐다. 협치라는 말은 쏙 들어갔다. 정치는 보이지 않고 정쟁만 불거진다. 국회에서 나오는 말은 갈수록 가벼워지고 국회 신뢰도는 바닥 모를 추락세다.

박완규 논설실장

국회 본연의 임무는 입법활동이다. 지금 국회에는 탄력근로제 단위기간 확대를 위한 근로기준법 개정, 최저임금 결정체계 개편을 위한 최저임금법 개정 등 시급한 입법과제가 산적해 있지만 법안에 관한 논의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20대 국회에 제출된 법안은 총 1만9247건에 달하는데 가결이나 부결 등으로 처리된 법안은 5975건에 그친다. 1만3272건이 계류 상태다. 상당수가 해당 상임위 법안소위에 상정조차 되지 않았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각 상임위에 계류법안 논의를 촉구했지만 요지부동이다. 정치권에서 한때 목소리 높여 외치던 선거제 개편은 지지부진하다. 총선 1년 전에 선거구를 획정하도록 한 공직선거법 조항에 따른 시한이 지난 15일이었지만 유야무야 넘겼다.

문 의장은 지난 10일 국회의 모태인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개원 100주년 기념식에서 의회주의를 언급했다. 100년 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기 위해 중국 상하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의정원에서 제정한 ‘대한민국 임시헌장’ 제2조에 ‘대한민국은 임시정부가 임시의정원의 결의에 의해 이를 통치함’이라고 명시한 데 대해 “우리나라 의회주의의 위대한 첫걸음이었다”고 했다. “오늘의 대한민국 국회가 임시의정원이 표방했던 민주적 공화주의와 의회주의의 가치를 제대로 구현하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할 시점”이라고도 했다. 야당인 자유한국당도 여권에 대한 반대 논리로 의회주의란 말을 자주 쓴다. 의회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국가의 정치적 결정이나 법률 제정을 의회에서 다수결 원리에 따라 행하는 정치방식’이다.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의회주의라는 말은 생뚱맞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독일 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는 저서 ‘현대 의회주의의 정신사적 상황’에서 ‘토론과 공개성’을 의회의 원리로 제시하면서 의회주의를 ‘토론에 의한 정치’라고 정의한다. “의회주의적인 모든 제도와 규범은 토론과 공개성에 의해 비로소 그 의의를 지니게 된다.” 그는 1923년에 펴낸 이 책에서 “의회주의의 상황은 오늘날 매우 위기에 처해 있다”고 했다. “오늘날 파당들은 의견을 토론하는 집단으로서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또는 경제적인 권력집단으로서 서로 대립하고, 쌍방 간의 이익과 권력의 가능성을 계산하고, 이러한 사실적인 기초에 의거해서 타협하고 제휴한다.”

지금 우리 국회는 어떤가. 슈미트가 비판한 당시 독일 의회보다 나은 것은 무엇인가. 헌법에는 “국회의원은 국가이익을 우선하여 양심에 따라 직무를 행한다”고 규정돼 있다. 지금 국회의원들은 이 조항을 잊은 건 아닌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막스 베버가 ‘소명으로서의 정치’에서 열정, 책임감, 균형적 판단을 정치가의 중요한 자질로 꼽은 것을 새겨볼 때다. 지금 국회의원들은 대충 시간을 보내다가 공천만 받으면 내년 총선에서 다시 금배지를 달게 될 것으로 여기는 모양이다. 어림 없는 생각이다. 유권자들은 내년 4월15일 총선 투표장에 갈 때 지금의 국회의원 행태를 또렷이 기억할 것이다. 지금과 같은 국회로는 우리 정치의 미래가 없다는 것을 유권자들은 잘 알고 있다.

 

박완규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