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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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길연의사람In] ‘모든 이의 날’에

주위에 욕설을 달고 사는 이가 별로 없다. 언어생활면으로 비교적 온건한 무리 속에서 살아왔던 듯싶다. 소설로 영화로 배운 욕설은 제법 되지만 만용을 부리면서까지 써먹을 기회는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욕설 이상의 파장을 가져올 실언으로 낭패를 자초한 이력은 꽤 쌓였다. 오래전 여고시절, 그것도 좋아하던 친구를 상대로 저지른 실언은 강력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부지불식간 내뱉은 그때의 문제적 발언을 떠올리면 부끄러움과 민망함이 되살아나 그만 땅속으로 꺼지고 싶다.

친구는 여러모로 나와 달랐다. 문학에 뜻을 두었으나 문화·예술적 편식이 심한 나에 비해, 그림을 그리던 친구는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하고 있었다. 대중문화와 상업예술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었다. 가족구성원 하나하나 까칠하고 제각각이어서 적막했던 우리 집에 비해, 다감하고 긍정적인 에너지가 충만했던 친구네 집안 분위기도 확실히 다른 점이었다. 아마도 다르기에 그 친구가 더욱 특별해보였고, 좀 더 가까워지고 싶었을 것이다. 친구는 어릴 적 앓은 소아마비로 걸음걸이가 불편했다. 그건 다른 점이라기보다 단지 신체적 특징일 뿐이었다.

어느 날, 친구의 형제자매가 부러웠던 나는 두 살 위인 나의 오빠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았다. 그러다 험담 끝에 무심코 “병신같이”라고 내질러 버렸다. 나는 곧 나의 실수를 깨달았다. 돌이킬 수 없는 참담한 망언이었다. 단순한 부주의로 덮어버리기엔 친구도 나도 상처가 너무 컸다. 그날 우리는 서로의 눈을 피한 채 헤어졌다. 그것이 끝이었다.

어디 그날, 그 한 번뿐이랴. 이후로도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인지하고도 뭉개버린 나의 실언이 무수했으리라. 친구도 나의 부주의를 포함해, 그날까지 알게 모르게 겪었어야 했던 것처럼 살아가는 내내 별별 모욕의 언사에 부닥쳤으리라. 세상은 그리 평화로운 데가 아니며, 이유 없는 미움과 사악한 적의가 넘쳐나는 곳이지 않은가.

4월 20일, 곡우인 오늘은 ‘장애인의 날’이기도 하다. 달력의 글귀가 오히려 차별적으로 느껴진다. 다시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되살아난다. 인간은 불완전하게 태어나서 끝끝내 완성되지 못하는 존재다. 신체로 드러나든 마음에 감춰두든 장애를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달력에 박힌 ‘장애인의 날’을 고쳐 읽어본다. ‘우리 모두의 날’. 올해의 슬로건은 ‘포용으로 꽃피는 따뜻한 동행’이라고 한다.

정길연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