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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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나의 여론조사 체험기

다음과 같은 문장은 어디에 사용돼야 적합할까.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을 계기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 인용되고 대선을 통해 문재인정부가 출범한 지 약 100일이 되었습니다.”

 

이 문장은 문재인정부 출범 100일 기념행사에서 사용되면 제격일 것이다. 뜻밖에도 이 문장은 2017년 서울 소재 한 명문대 대학원에서 진행한 ‘ICT(정보통신기술) 관련 정부 조직개편에 관한 국민인식 조사’에서 사용됐다. ‘박근혜정권 탄핵’ 소개로 시작한 이 설문지 도입부는 정치색이 가득했다. ‘문재인정부는 시간적 여유가 없다’, ‘여소야대 제약 속에서’, ‘현행 조직으로는 4차 산업혁명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렵다’ 등이었다.

설문은 담당 교수의 허락을 받은 뒤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설문 문항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냐’는 학생들의 지적이 나왔지만 지도교수의 귀에는 전달되지 않았다. 교수의 의지가 담긴 설문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 기관도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다. 의뢰자가 할당한 샘플(성별, 연령, 지역 등) 수에 맞춰 여론조사를 진행하고, 결과를 엑셀 시트로 정리해 주면 이들의 역할은 종료된다. 이렇게 탄생한 조사결과는 논문작성에 활용되기도 하고, 정부와 기업이 내놓는 보고서 속에 포함되기도 한다.

 

정선형 외교안보부 기자

학계가 이 정도이면 언론사의 의뢰를 받아 수행되는 여론조사의 상황은 어떨까. 지난달 15일과 18일 여론조사업체 리얼미터는 이미선 헌법재판관 후보자에 관한 여론조사를 발표했다. 첫 번째 조사에서 적격 응답은 28.8%였지만, 두 번째 조사에선 응답자 43.3%가 임명 찬성 입장을 밝혔다. 리얼미터 측은 “여론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놨지만, 이 결과는 두 개의 설문 문항이 서로 달라서 나왔다는 평가다. 두 번째 설문조사에 문재인 대통령의 의지가 어떤지를 추가해 응답자에게 특정 방향성을 제시했기 때문이다.

리얼미터가 지난달 29∼30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나왔다. 선거제 개편, 공수처 신설 등 쟁점법안 패스트트랙 지정 국민평가를 묻는 문항에는 해당 쟁점법안이 무엇인지, 어떤 쟁점이 있는지에 대한 설명은 한 줄도 제시되지 않았다. 다만 “여야 4당은 관련 쟁점법안을 패스트트랙 안건으로 지정했는데, 이에 대해 자유한국당은 반대하고 있다”는 서술만 있을 뿐이다.

여론조사 기관에서는 ‘우리는 잘못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여론조사 기관은 의뢰를 수행하는 ‘을’의 입장이지 주체적으로 여론조사를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에 의뢰기관의 각성이 우선돼야 한다. 그럼에도 여론조사 기관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신뢰가 크게 떨어져 버린 우리 언론의 발자취를 그대로 밟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 때문이다. 우리 언론사가 신뢰 상실 배경으로는 정치적 편향성과 정부와 취재원의 발언을 제대로 검증하지 않는 태도를 꼽곤 한다. 이런 지적은 최근 여론조사 기관이 보인 태도에도 그대로 적용될 만하다. 정치적 편향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의뢰기관이 작성할 설문지라며 책임에서 벗어나려 하는 모습에서 신뢰성을 기대할 수 있을까. 적어도 잘못된 조사를 ‘정상적이다’라고 포장하지 않는 여론조사 기관의 모습을 보고 싶다.

 

정선형 외교안보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