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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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술탄’ 에르도안

술탄은 이슬람권의 정치지도자다. 원래는 종교지도자인 칼리프보다 격이 낮았다. 술탄 임명권자가 칼리프였다. 13세기 이후 오스만제국 때 지위가 역전돼 술탄이 이슬람 최고지도자가 됐다. 오스만제국에서는 장남의 왕권 승계가 보장되지 않았다. 왕자들 간의 권력투쟁은 필연이었다. 술탄이 된 왕자만 궁에 남고 패배한 왕자는 저승행을 면치 못했다.

7대 술탄 메흐메트 2세부터 13대 술탄 메흐메트 3세까지 약 160년간 한 왕자가 술탄에 오르면 다른 형제들을 죽여 버리는 형제살해 전통이 이어졌다. 1595년 즉위한 메흐메트 3세는 형제 19명을 모조리 죽였다. 참으로 비정한 권력이 아닐 수 없다. 1603년 아흐메트 1세 때 형제를 살해하는 전통은 별궁에 가두는 것으로 대체됐다. ‘금빛 감옥’으로 불리는 카페스에서 유폐생활을 하던 왕자들은 대부분 정신질환을 앓다 죽었다고 한다.

메흐메트 2세는 형제살해 전통을 세웠지만 오스만제국의 위대한 술탄으로 추앙받는다. 기독교권인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은 정복 술탄이었다. 그는 성 소피아성당을 이슬람사원으로 바꾸고 그 옆에 톱카프 궁전을 새로 지었다.

케말 아타튀르크는 오스만제국의 1차 세계대전 패전 이후 열강의 손에 가루처럼 날아갈 뻔한 터키를 온전하게 보존해 국부 칭호를 받는다. 터키 초대 대통령인 그는 종교국가로는 미래가 없다고 봤다. 그래서 국민의 99%가 무슬림이지만 술탄 제도를 폐지하고 정교분리를 헌법에 못 박았다.

철권통치로 ‘터키의 21세기 술탄’이라 불리는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은 케말 아타튀르크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메흐메트 2세 때의 영광을 꿈꾸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세속주의를 멀리하면서 모스크 건설, 히잡 착용 확대 등에 나서고 있다. 국민투표를 통해 2029년까지 집권할 수 있는 기반도 마련했다. 급기야 지난 3월 실시된 이스탄불 시장 선거 결과도 뒤집었다. 재검표에서 야권 후보 당선이 확인되자 투표함 관리의 문제점을 들어 재선거를 실시하도록 한 것이다. 시대착오적인 역주행에 독재까지 그의 권력 남용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훗날 적폐청산 대상이 될 운명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김환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