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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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日王은 국가 상징… 사우디는 무소불위의 철권 통치 [세계는 지금]

세계 200국 중 28국 왕권·입헌군주제 / 日·泰·유럽국은 입헌군주제 채택 / 英, 왕손 탄생·泰는 대관식 이목 / 대부분 왕위 계승 남녀 구별 없어 / 카타르 등 중동은 男중심 전제군주제 / 군주가 행정권 등 실질적 권력 행사 / 정적 제거 등 물의로 국제사회 지탄
해리(35) 왕손 부부 사이와 로열 베이비 아치.

최근 각국의 왕실 이벤트가 미디어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지난 6일(현지시간) 영국에서는 엘리자베스 2세(93) 여왕의 손자인 해리(35) 왕손 부부 사이에서 로열 베이비 아치가 태어나 환호성이 울리고 있다. 메건 마클(37) 왕손빈이 미국 출신이어서 미·영혼혈 왕증손 탄생에 미국도 들썩거리는 분위기다.

태국 마하 와치랄롱꼰 국왕(왼쪽)과 수티다 왕비

지난 4일 마하 와치랄롱꼰(67) 태국 국왕의 대관식이 화려하게 거행됐다는 뉴스도 각국 매체를 장식했다. 국왕이 결혼에 앞서 26세 연하의 승무원 출신 근위대장과 결혼식을 올린 소식도 화제였다. 지난 1일 일본에서는 아키히토(明仁·86) 상왕(上王)의 퇴위와 나루히토(德仁·59) 새 일왕의 즉위가 축제분위기 속에서 진행됐다.

군주제는 이제 우리에게는 낯선 풍경이지만 세계 200여개국 중 28개국이 여전히 왕정이나 입헌군주제를 택하고 있다. 영연방의 캐나다, 호주처럼 영국왕을 상징적인 국가원수로 하는 나라는 제외한 숫자다. 군주제 전통은 평등과 특권 배제를 중시하는 현대사회의 가치와 괴리되는 측면이 있다. 각국 왕실이 국민중심적, 서민친화적 모습을 연출하며 존재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현대 군주제는 크게 유럽형과 중동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유럽형은 영국같이 군주가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고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서 존재하는 입헌군주제다. 영국,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페인 등이 이에 속한다.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

지난달 21일 93세 생일을 맞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은 영국 군주로서는 역대 최고령이자 최장 재위기간(1952년∼현재)을 기록 중이다. 영국 국민의 지지도 높고 공무에도 정력적이다. 지난달 프랑스 노트르담 대성당 화재 시에는 “내 생각과 바람은 프랑스 여러분과 함께 있다”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게 위로메시지를 보내는 등 왕실외교도 전력을 다하고 있다. 여왕은 1999년 방한 때 경북 안동 등을 찾아 소탈한 모습을 보여 국내에서도 비교적 친밀감을 느끼고 있다.

유럽의 군주제에서는 아시아·중동국과는 달리 여성 국왕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특징이다. 현재 덴마크도 마르그레테 2세(79) 여왕이 집권하고 있다. 스페인 펠리페 6세 국왕의 왕위 계승 서열 1위도 장녀인 레오노어(13) 공주다.

유럽 외에서는 일본처럼 부계 승계를 원칙으로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건국 이래 형제상속을 해 왕위 승계 서열 1위를 뜻하는 왕세제(王世弟)를 책봉해 왔으나 현 국왕은 아들(무함마드 빈 살만)을 왕세자로 정하면서 부자상속을 노리고 있다.

중동형은 군주가 행정권을 포함한 실질적인 권력을 갖고 통치하는 전제(專制)군주국 형태다. 대부분 산유국으로 막대한 오일머니를 보유하고 있다. 중동 맹주(盟主)인 사우디와 요르단, 쿠웨이트, 카타르 등 아랍계 국가를 예로 들 수 있다. 공익재단법인 중동조사회 다카오 이치로(高尾一郞 ) 연구원은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에 “왕실은 풍부한 석유자원의 부를 국민에게 배분해 세금 등의 부담을 적게 하고 있기 때문에 왕실에 대한 국민 불만이 적다”고 왕실 존속의 배경을 설명했다.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 왕세자.

세계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에서는 2015년 즉위한 살만 빈 압둘아지즈(84) 국왕보다 무함마드 빈 살만(34) 왕세자가 더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다. 과도한 석유 의존도에 탈피하려는 탈(奪)석유 정책과 여성에게 운전을 허용하는 것과 같은 개혁정책이 긍정적 이미지를 줬다. 반면 권력 확보를 위해 왕족 등 정적을 가차 없이 살해하는 냉혹한 면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왕실을 비판하는 기사를 쓴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가 살해된 뒤 논란에 휩싸였으나 국제사회 묵인 속에 대외 행보를 재개했다.

최근 우리나라와 관계가 급밀착한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은 지역 군주국을 의미하는 7개 토후국(土侯國)으로 구성된 나라다. 아부다비 왕(수장)이 대통령을 맡고, 두바이 왕이 부통령과 총리를 겸임한다. 아부다비에서는 셰이크 칼리파 빈 자예드 알 나흐얀(71) 왕(UAE 대통령)의 건강이 좋지 않아 이복동생인 모하메드 빈 자이드 알 나흐얀(58) 왕세제가 실권을 잡고 있다. 두바이 왕세자 셰이크 함단 빈 무함마드 알 막툼(37)은 중동 왕실의 스타다. 인터넷에 자신의 일상을 공개하면서 UAE를 비롯한 걸프지역 젊은층 사이에서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다. 지난달 한국을 방문한 뒤 서울 시내를 관광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과 동영상을 인스타그램과 유튜브에 올려 화제를 모았다.

아시아·태평양지역에서는 일본과 같은 입헌군주제나 브루나이와 같은 전제군주제가 혼재돼 있다. 태국의 경우에는 입헌군주제 국가이지만 현실정치에 대한 국왕의 영향력이 막강하다. 현 국왕의 선친인 푸미폰 아둔야뎃 전 국왕은 재위기간 70년(1946∼2016) 동안 무려 19차례의 쿠데타가 있었는데 정치적 격변기마다 중재자 역할을 자처하며 나라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막아 국민의 존경을 받았다. 1957년 영국에서 독립한 입헌군주제 연방국가인 말레이시아의 국왕은 13개주(州) 중 9개주의 술탄이 돌아가면서 맡고 있다.

상당수 군주국이 제1, 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사라졌다. 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에티오피아(1974), 라오스(1975), 이란(1979), 네팔(2008)과 같은 왕정국이나 입헌군주제국가가 붕괴했듯이 현존 왕실도 새로운 변화와 국민 바람에 부응하지 못하면 위기에 봉착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 왕실 문제에 정통한 기미즈카 나오타카(君塚直隆) 간토가쿠인(關東學院)대 교수는 현대 군주국에 대해 “왕위 승계권의 남녀평등, 왕실경비 지출 투명화, 국민수준에 따르는 생활방식으로 국민 지지를 얻고 있다”고 말했다고 요미우리신문이 전했다.

 

도쿄=김청중 특파원 c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