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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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가만난세상] 조현병을 비극으로 만드는 사회

“참 앞 동 그 ‘연설가 아주머니’는 갑자기 어디로 갔대요. 요새는 통 연설을 안 하나 보네….”

고향에 오랜만에 돌아와 아파트 단지 내에 ‘연설가 아주머니’로 불렸던 중년 여성이 불현듯 떠올라 엄마에게 근황을 물었다. 유독 여름철이면 저녁 7~8시쯤 베란다 문을 열고 나타나 온 동네 주민을 청중 삼아 세태 비판을 울부짖듯 토해내던 중년의 여인. 남부럽지 않은 스펙을 지녔지만 온갖 세파에 시달리다 결국 ‘실성했다’는 낙인을 달고 살았던 불운한 주민. 그녀는 동네의 ‘스캔들’ 같은 존재로 조롱을 받았지만 연민과 동정의 대상이기도 했다.

김라윤 사회2부기자

해박한 사회·정치적 지식과, 확신에 찬 쩌렁쩌렁한 목소리. 그녀의 연설을 처음 들었을 때는 흡사 1인 시위라도 하는 줄 알고 귀를 기울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하지만 흐트러진 옷매무새, 자신을 대통령이라 칭하며 연설 후반부로 갈수록 심해지는 욕설, 기이한 행동 등을 목격하며 그녀가 조현병을 앓고 있음을 짐작했다.

그런 그녀에게서 결코 뜻밖의 행복한 소식까지 기대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편과 이혼한 후 내쫓기듯 이사를 가고, 어머니가 죽은 후 돌연 자살을 했다는 그녀의 결말은 반전 하나 없이 비극으로 치닫는 대충 만든 슬픈 영화의 결말 같아 말문을 막히게 했다.

유독 한국에서는 조현병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 공고하다. 부모가 제 자식의 병조차 인정하려 들지 않아 ‘치료의 골든타임’을 놓친 채 무한정 방치하기 십상이라는 게 정신과 의사들이 자주 터뜨리는 분통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치료 한번 받지 못한 채 주변의 철저한 외면 속에 극단적 선택을 했을 그녀의 최후를 떠올리자니 모종의 죄책감마저 느껴졌다. 아마도 그녀를 ‘걱정’하기보다 구경거리 보듯 재미있어 하며 연설 중간 피식거리기까지 했던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었을 거다.

조현병은 한번 발발 후 완치까진 힘들다. 하지만 꾸준히 약물치료를 받고 관리를 잘하면 예후가 나쁘지 않아 사회생활에 큰 문제가 없는 경우도 많다는 게 정신과 의사들의 설명이다. 한 의사는 “조기치료가 중요하다. 병원을 찾아오는 환자 중에선 교수, 한의사 등 전문직 등도 적잖다”며 “조현병에 대한 편견, 불평등한 대우로 인한 실직, 빈곤과 고립 등이 진짜 문제인데 마치 조현병 자체가 문제라는 듯 인식하는 게 진짜 문제”라고 지적했다.

최근 ‘진주 아파트 방화 살인’ 등이 이슈가 되면서 조현병이 걸리면 주변을 해치기 쉽다는 편견이 더욱 심화하는 추세다. 하지만 사실 보도에서 가해자의 ‘정신병력’이 강조돼 불거진 착시효과일 뿐 조현병 등 정신질환을 가진 사람이 일반인보다 살인, 폭력 등 강력범죄를 저지를 확률 자체는 오히려 더 낮다는 게 학계의 통설이다.

신경계가 망가지기 전에 조기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면, 가족의 치료지원이 꾸준히 이뤄졌더라면, 더 나아가 ‘사실상’ 가족 없는 조현병 환자의 치료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관련 제도가 잘 갖춰져 있었더라면 충분히 막을 수 있었던 비극은 아니었을까. 편견을 허물어도 모자랄 판에 공고화하는 편견 속에서 또 다른 ‘연설가 아주머니’의 비극이 반복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 요즘이다.

 

김라윤 사회2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