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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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규칼럼] 일본 레이와 시대의 한·일관계

전후세대 나루히토 일왕 즉위 / 한·일 관계 현실 냉철히 돌아보고 / 미래 향해 나아갈 계기 마련해야 / 양국 정상회담 조건 없이 열길

오늘날의 일왕(천황)제는 일본이 근대화에 눈을 뜨면서 시작됐다. “19세기 정치가 이토 히로부미가 탄식한 것은 사회를 하룻밤 사이에 서양식으로 근대화하기 위해서는 그 나름의 심리적 연료와 규율이 필요한데 그것을 공급해줄 만한 고유의 신앙체계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때 채택한 해결책이 교토 궁정에서 그늘 속에 살고 있는 젊은 메이지 천황을 수도 도쿄로 끌어내어 서양식 군복 차림의 군주로 전국에 현시(顯示)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의 일본학자 노마 필드가 쓴 ‘죽어가는 천황의 나라에서’의 한 구절이다. 짙은 눈썹에 군복 차림을 한 메이지 초상화 사진이 전국에 뿌려졌다.

메이지의 손자 쇼와 일왕은 2차 세계대전 패전 이듬해인 1946년 신격을 부인하는 ‘인간 선언’을 한 뒤 군복을 양복 정장으로 갈아입고 기차편으로 전국을 순행하면서 국민에게 다가섰다. 당시 일본 작가 사카구치 안고는 산문 ‘천황 폐하께 바치는 글’에서 “천황은 현재 미치광이들의 인기를 모으고 환호의 폭풍우 속에 있다. 도의는 자연히 혼란해질 터다”라며 “이래서는 일본은 구제 불가능하다”고 힐난했다. 하지만 1989년 쇼와의 죽음을 앞두고 일본은 거국적으로 ‘자숙’을 할 정도로 상징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박완규 논설실장

쇼와의 손자 나루히토가 지난 1일 새 일왕에 즉위했다. 이날 아베 신조 총리와 정부 고위관리 등을 만나 “헌법에 따라 일본 국가 및 일본 국민통합의 상징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겠다”며 “국민의 행복과 국가의 발전, 그리고 세계평화를 간절히 희망한다”고 했다. 새 연호인 ‘레이와(令和)’의 시대가 열렸다. 일본 고대 시가집 ‘만요슈(萬葉集)’에 나오는 구절에서 따온 레이와는 ‘맑고 온화하다’는 의미라고 한다. 평화를 기원하는 마음이 담겼다는 것이다.

레이와 시대 개막을 계기로 한·일관계를 복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곳곳에서 나온다. 첫 전후세대 일왕의 상징성을 감안한 주장이다. 한·일관계가 워낙 경색돼 있기 때문이다. 양국 정부가 공개적으로 인정할 정도다. 그러니 어떤 기회라도 잡아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주 KBS 대담 프로그램에 출연해 “일본의 새 천황 즉위를 계기로 한·일관계가 발전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갖고 있다”고 했다. “한·일관계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앞으로 더 미래지향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양국 정부가 지혜를 모을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다음 달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와 관련해 “그때 일본을 방문할 텐데 아베 총리와 회담할 수 있다면 좋은 일”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과 아베 총리가 만나 양국 관계의 미래를 열어나가야 한다. 한국과 일본 정부가 다음 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각료이사회 때 외교장관 회담을 여는 방안을 조율 중이다. 한국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 등 양국 현안과 한·일 정상회담 개최 방안을 논의할 것이다. 최근 부임한 남관표 신임 주일대사의 역할도 주목된다. 주일 한국대사관 근무 경험이 있는 외교관 출신이고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을 지낸 문 대통령 측근이기 때문이다.

마침 아베 총리는 아무런 조건 없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겠다고 했다. 그동안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의 진전을 조건으로 내걸었지만 이제는 그것 없이도 회담을 하겠다는 뜻이다. 일본은 지난해 세 차례나 남북정상회담을 한 우리 정부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북·일 정상회담 추진을 한·일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정부는 한국이 강제징용 문제 대책을 내놓지 않으면 한·일 정상회담이 어렵다는 입장이지만 여기서도 조건을 버려야 한다. 회담에서 북한 문제에 집중해도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강제징용 문제는 양국 간 협의의 틀을 만들자는 합의만으로 충분하다.

지금이야말로 한·일관계가 미래를 향해 나아갈 모멘텀을 마련할 절호의 기회다. 놓쳐서는 안 된다. 우리 정부가 한·일관계의 의미와 현주소를 냉철히 돌아보는 데서 시작할 일이다.

 

박완규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