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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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라면 쇼윈도 ‘마네킹’ 벗어나 노래로 승부해야” [아이돌 전성시대의 그늘]

<4회> 전문가가 보는 진짜 가수 (끝) / 춤·외모에 집중, 악화가 양화 구축하게 돼 / 정체성 없는 선정성 이슈몰이는 팬 기만 / 음악 외적 이슈로 만든 인기는 오래 못 가 / 아이돌 댄스 음악 편향에 대중 쉽게 피로 / K팝 강력한 퍼포먼스로 글로벌 진출 불구 / 가창 실력 뒷받침 안되면 지속 성공 못해
지난달 10일 홍대 무브홀. 신인 걸그룹 ‘밴디트’(BVNDIT)의 첫 번째 싱글 앨범 ‘밴디트, 비 앰비셔스’(BVNDIT, BE AMBITIOUS!) 쇼케이스가 열렸다. 밴티드는 이날 처음 취재진 앞에 섰지만, 그들은 기존의 신인 아이돌 가수들과 달랐다. 준비된 AR(All Recorded·반주와 가수의 보컬, 랩 등 모든 요소가 담긴 음원)에 맞춰 춤만 추지 않았다. MR(Music Recorded·반주 음원)에 격한 춤을 추면서 직접 노래를 불렀다. 라이브 무대였던 것이다.
걸그룹 밴디트

지난달 29일 홍대 롤링홀. 걸그룹 ‘지구’(GeeGu)가 두 번째 싱글 앨범 ‘문라이트’(Moonlight)의 발매 기념 쇼케이스를 진행했다. 지구 또한 이날 무대를 모두 라이브로 소화했다. 앨범 타이틀곡 ‘문라이트’을 직접 불렀으며, 즉흥 아카펠라와 비트박스를 선보였다. 틀어준 음원에 맞춰 입만 뻥끗거리지 않았다는 얘기다.

걸그룹 지구

최근 대중가요계에서 ‘진짜 노래’를 부르는 아이돌 가수가 간간이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아직 그 수가 미비하지만 그럼에도 업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작은 돌멩이가 떨어지며 일으킨 물결이지만, 점점 그 파문이 널리 번져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아이돌 가수 전성시대를 열었던 1990년대 초기 아이돌 가수들과는 상당 부분 성격이 다르다. 당시 아이돌 가수에게 노래 실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큰 키에 잘생기고 아름다운 얼굴, 멋진 춤과 군무 등 외형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노래를 못 불러도 가수로 성공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올 만큼 노래와는 무관한 멤버들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들은 신인과 기성의 구별 없이 그 무엇보다 노래에 집중한다. 신인 아이돌의 경우 특히 연습생일 때 가창력을 키운다. 완벽한 수준은 아니다 할지라도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정도의 가수로 데뷔한다. 기성 아이돌은 활동을 하면서 부족한 노래 실력을 키우고 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에 도전해 춤보다 노래 실력을 알리는 데 노력한다.

‘진짜 가수’화는 노래 실력에만 국한되지 않다. 아이돌 가수들은 작사, 작곡에 직접 참여하는 등 음악 창작 부분으로도 영역을 넓히고 있다. 이들이 만든 곡이 앨범에 포함되는 것은 물론이고, 타이틀곡 등 수록곡을 선정하는 회의에도 이들의 참여는 적극적이다. 무료 음원사이트나 팬카페 등의 공개 또한 적극적이다.

대부분의 아이돌 가수는 기획사와 작곡·작사가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이들의 작사·작곡 활동은 이례적이다. 특히 음악적 소양이 부족했던 과거 아이돌 가수와 비교하면, 그들이 엄두도 못 냈던 것을 직접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팬들은 이러한 아이돌 가수를 ‘자체제작돌’, 또는 ‘자작돌’이라고 부르며 응원한다.

선배 가수, 평론가, 기획사 관계자, 음악산업 종사자 등도 이러한 아이돌 가수의 변화에 긍정적인 반응이다. 이들은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본질에 집중하고, 그런 가수가 존중받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밝혔다.

강헌 한국대중음악연구소 소장은 “과열 경쟁 속에서 아이돌 가수는 자신을 알리기 위해 노래보다 춤이나 외모 등 짧은 시간에 승부를 낼 수 있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며 “대부분의 아이돌 가수가 이러한 모습을 보이면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경지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강 소장에 따르면 한 해 수백, 수천 명의 아이돌 가수가 데뷔한다. 그 가운데 대부분이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하고 사라진다. 이러한 과열 경쟁 때문에 아이돌 가수들은 짧은 시간 안에 대중에게 자신을 각인시키는 방법을 찾는다. 춤이나 외모 등 외형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강 소장은 “청각적인 요소보다 시각적인 요소가 대중에게 자극을 주는 속도가 훨씬 빠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아이돌 가수라 할지라도 가창력을 기본 전제로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며 “특히 K팝의 글로벌 시장 진출이 늘어나면서 노래를 못 부르는 멤버에 대해서는 ‘가수’라 칭하지 않는 경우가 생겨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노래하는 음유시인’이라 불리는 데뷔 32년 차 가수 ‘안치환’도 “노래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을 믿고, 묵묵히 내길(가수)을 걸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특히 음악 자체에 집중할 것을 당부했다. 그는 “(부동산 구입 등) 자기 미래에 대한 투자도 중요하지만, 음악적 탐구와 정열을 지키는 것이 더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대중에게 인정받는 것은 쉬운 게 아니다. 세상에 선택받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며 “음악 외적인 것으로 이슈를 만들기보다 노래 자체가 가지고 있는 힘에 뜻을 두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어 “노래 이외의 것으로 인기를 얻는다면, 그 인기는 결국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홍대 인디계를 대표하는 성지이자 공연장인 롤링홀의 김천성 대표도 “음악적 역량이 부족한 사람이 가수로 데뷔하면 언젠가는 탈이 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써준 대로 부르고, 입혀주는 대로 입고, 지시한 대로 말하는 사람을 아티스트, 뮤지션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단지 유명해지고 싶어서 가수로 데뷔하는 것은 팬들에 대한 기만”이라고 꼬집었다. 특히 음악적 신념이나 가수로서 정체성을 갖추지 못한 아이돌에 대해선 쇼윈도에 서있는 ‘마네킹’과 같다고 비유했다. 선정성으로 이슈몰이를 하는 아이돌에게도 쓴소리를 건넸다. 김 대표는 “대중의 관심을 모으기 위해 선정성을 내세우는데, 결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며 “이는 가치관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10대들에게 잘못된 가치관을 주입시킬 수도 있기 때문에, 아이돌들이 스스로 금기시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고정민 홍익대 교수(문화예술경영대학원)는 “아이돌 가수의 댄스 음악이 나쁘다고만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중이 쉽게 피로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걱정했다. 이미지나 성 상품화 등으로만 승부하려는 아이돌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고 교수는 “노래로 히트하기 힘들어 성적 이슈 등을 통해 대중에게 어필하려는 것”이라며 “사회 윤리에 반하는 수준이 아니라도,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과 비슷하기 때문에 좋은 선택은 아니다”고 지적했다. 이어 “K팝이 전 세계로 뻗어갈 수 있었던 것은 군무 등 강력한 퍼포먼스라는 틈새시장을 노린 전략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라며 “하지만 결국 노래와 춤 등에서 실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지속적인 성공을 보장할 수 없다”고 조언했다.

방송계 한 관계자는 “아이돌 가수가 넘쳐나는 지금, 다들 비슷한 콘셉트와 비슷한 실력을 가지고 나온다”고 우려했다. 그는 “이제 방송사들도 노래가 중심이 되는 코너를 만드는 등 색다른 방식의 프로그램을 모색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복진 기자 bo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