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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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벗어나 욕망의 주체가 된 여성… ‘현대식 멜로’ 출발점 [한국영화 100년]

④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 / 사회생활 발 내딛은 대학교수의 아내 / 갖은 유혹에 흔들리다 집으로 돌아와 / 베스트셀러 원작에 영화적 기술 더해 / 개봉 당시 흥행·평단 호평 ‘두마리 토끼’ / 애욕 품은 여성·‘전후파’ 젊은이 등 등장 / 전쟁의 상흔·신파·모럴 모두 버리고 / 생기발랄한 새 시대의 변화상에 집중 / 전근대 규범 탈피… 솔직한 모습 담아

◆한국영화의 한계를 극복한 보기 드문 ‘쾌작’

전후의 1950년대는 해방 공간에 비해 집단 이념의 무게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시기였다. 비록 반공주의라는 이념이 요구되고 있었으나 1960년대와는 달리 억압적으로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이 시기에 빠르게 유입된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이념이라기보다는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는 새로운 시대 흐름으로 받아들여졌다. 특히 여성의 해방을 외치는 목소리가 힘을 얻기 시작하면서 사적 영역을 주 무대로 삼는 멜로드라마는 변화의 기운을 담을 적극적 장르가 될 수 있었다.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1956)은 멜로드라마의 본격적인 부상을 알리는 영화다.

영화 ‘자유부인’의 오선영(김정림 분·사진 오른쪽)은 양품점 사장인 한태석(김동원 분)의 끈질긴 구애를 받아들인다. 남편이 아닌 남자들과 포옹하고 키스하는 장면이 들어 있다는 이유로 개봉 전날까지도 검열 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오선영(김정림 분)은 대학교수 장태윤(박암 분)의 아내이지만 남편의 반대를 무릅쓰고 양품점에 취직하며 사회생활에 발을 내디딘다. 동창생 윤주(노경희 분)는 여성도 경제적으로 자립해야 한다며 그녀를 자극하고, 옆집 대학생 청년 춘호(이민 분)는 댄스를 가르쳐주겠다며 유혹한다. 남편 역시도 자신에게 호감을 품은 젊은 여성과 애틋한 만남을 갖고 있다. 이내 마음을 다스리는 남편과 달리 선영은 들뜬 마음을 쉬이 가라앉히지 못한다. 청년에게 댄스 파트너 이상의 친밀한 관계를 기대하고, 유부남의 구애에 흔들리기도 한다. 결국 그녀가 얻은 것은 망신과 모욕뿐이다. 집으로 돌아온 선영은 남편에게 용서를 구한다. 과연 과거의 그녀로 돌아가는 것이 가능할까.

영화 ‘자유부인’의 주인공 오선영(김정림 분·사진 왼쪽)은 이웃집 청년 신춘호(이민 분)에게 춤을 배운다.

이 영화는 1954년에 8개월간 서울신문에 연재됐던 정비석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한국 최초의 베스트셀러가 된 인기 소설의 서사에, 카메라 감독 출신인 한형모 감독의 영화적 기술을 더했다. 1956년 6월에 수도극장에서 개봉됐을 때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수확’이라 할 만큼 높은 흥행 성적을 거뒀으며 평단의 반응도 호평 일색이었다. 교수 아내가 잠시 일탈했다가 가정으로 돌아간다는 줄거리는 원작을 따른 것이지만, 구체성과 사실성 면에서는 영화가 소설보다 한 수 위였다. 공간을 가로지르는 카메라의 움직임이나 속도감 있는 편집은 그간의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최고 수준이었다. 감독인 이봉래는 국산 영화로서는 처음 보는 ‘쾌작’이며, “오랜만에 정말 영화다운 국산 영화를 감상하는 즐거움을 느꼈다”고 찬사를 보냈다. 국산 영화가 으레 가질 법한 한계를 극복한 매우 현대적인 감각의 영화라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였다.

◆사회상을 생생히 담은 현실 감각

이 영화가 구현해 낸 풍경은 전 시대의 영화들과 많이 달랐다. 기존의 신파극과는 달리 눈물의 페이소스(pathos·애수)에 기대지도 않았고, 자기희생과 헌신이라는 통속적인 모럴(moral·도덕)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이 영화의 매력은 사회상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현실 감각에 있다. 무엇보다 세태를 묘사하는 사실성과 속도감이 돋보인다. 영화의 엔딩은 무책임한 방종에 대한 경계에 방점을 두고 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감상적이지도 무겁지도 않다. 오히려 경쾌한 편에 속한다. 인물들은 구태의연한 선악의 구도에서 벗어나 있고, 제각기 자신의 속내를 솔직하게 드러낸다. 최고급만을 찾는 사기꾼부터 사업가를 꿈꾸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여성에 이르기까지, 영화 속 인물들은 장르의 전형적 캐릭터라기보다는 당시 급격하게 변하던 세태에서 가져온 것이었다. 프레젠트(present), 엔조이(enjoy), 베드 퍼퓸(bed perfume)과 같은 단어만이 아니라 “스타일이 베리 굿(very good)”, “마담, 아이 러브 유(I love you)” 같은 대사를 등장시켜 미국 문화의 강한 영향 아래에 있는 한국사회와 대중들의 마음 풍경이 풍부하게 담겨 있는 영화다.

영화 ‘자유부인’에서 남편의 압제에서 벗어나려면 경제적 독립이 필요하다는 최윤주(노경희 분·사진 왼쪽)와 사기꾼 백광진(주선태 분)이 파트너가 된다.

‘자유부인’이 보여주는 풍경 가운데 인상적인 부분은 육체적 욕망의 재현이다. 감정만큼이나 육체가 중시되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물론 육체적 사랑에 대한 묘사가 이 영화에서 처음 등장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영화가 나오기 전에 이미 ‘미망인’(박남옥 감독, 1955)과 같은 영화가 존재했다. 한국 최초로 여성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는 딸을 데리고 피란살이하는 전쟁미망인(이민자 분)을 통해 모정보다 앞서는 여성의 애욕을 보여준다. 당시 이 영화를 말하는 자리에서 시나리오 작가 조남사는 “미망인의 생리적 욕구, 사회에서 돌보아 주는 이 없는 미망인의 육욕”이 영화의 주제라 말하며, 사실성을 예리하게 포착한 감독의 역량을 높이 평가했다. 육욕 자체가 문제될 것은 없고, 가치 평가의 잣대가 되지도 않는 시대가 된 것이다. ‘자유부인’은 이러한 육체적 이끌림을 보다 전면화했다는 의의가 있다. 또 집안 살림과 육아에 전념하던 아내가 욕망의 주체가 되는 과정을, 예외적인 한 인물의 일탈이 아니라 당대 사회의 주된 흐름과 함께하는 것으로 그려낸 점에서 주목된다.

‘자유부인’의 포스터.

젊은이의 모습 또한 눈길을 끈다. 자유분방한 대학생 춘호나 외국인 회사에 근무하는 은미, 춤을 잘 추는 조카 명옥은 전 시대에는 보기 드물었던 젊은이들이다. 그들에게 결혼과 가족 만들기는 애초부터 관심 밖이다. 육체 또한 윤리에 구속받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그런 점에서 춘호는 연상의 여성을 유혹하는 ‘제비’와는 다르다. 형편이 어려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게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개방적 사고를 하는 이런 젊은이를 가리켜 당시 평단은 ‘아프레게르’(apres-guerre) 또는 ‘전후파’(戰後派)라 불렀다. 본래 이 말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새로이 등장한 예술운동을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1950년대 당시 이 단어는 전란 후에 출현한 새로운 인물형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됐다. ‘자유부인’은 고전적인 순정녀와 순정남과는 세계 인식과 애정관을 달리하는 ‘아프레게르’를 현대 젊은이의 모습으로, 그것이 갖는 양면성까지를 실감 나게 보여줬다.

◆현대식 멜로드라마의 출발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이 영화의 사실성을 두고 의문을 가질 수 있다. 전시 상황이 불과 3~4년 전의 일인데도 영화 속에 전쟁의 상흔이 전혀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사회 드라마와 흡사할 정도로 현실을 “지나치게 뚜렷이” 묘사했다는 평을 받았다. ‘자유부인’은 신파물과 다른 ‘현대식 멜로드라마’로 명명됐고, 현대인의 애정 윤리와 “사회 문화적 변화의 진면목을 담아내고” 있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또는 미개척지로 있는 ‘현대극’ 내지 ‘도시영화’의 새 영역을 확대하는 성과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스크린에 담긴 서울은 전쟁으로 황폐해진 도시가 아닌 생기발랄한 변화의 공간이다. 거리는 움직임의 활기로 가득하고, 거리를 채우는 사람들의 표정은 밝다. 동창 모임에 등장한 가수 백설희가 들려주는 노래 ‘아베크의 토요일’의 가사처럼, 사람들은 대개 설렘과 즐거움으로 들떠 있다. 때론 클럽에서 흘러나오는 맘보 음악의 리듬처럼 흥겹거나 열정적이기도 하다. ‘자유부인’이 재현한 것은 전후의 부분적인 현실이지만, 적어도 영화 속의 이런 생동감은 변화를 열망하던 1950년대 한국사회의 활력을 반영한다. 영화 속 경쾌함도 사회 변화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던 대중의 정서를 짐작게 한다. 이른바 ‘현대식 멜로드라마’는 오랫동안 전근대적 가치 규범에 함몰되지 않는 여성들의 자유롭고 솔직한 목소리를 담아내는 장으로 기능했다. 그것을 가능케 한 도화선이 ‘자유부인’이었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오영숙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 HK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