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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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당 명연주의 산증인, 문성욱 음향감독

두터운 방음창 너머 텅 빈 객석이 있고 그 뒤로는 무대가 보인다. 길쭉하게 뻗은 10평 남짓한 공간의 중심은 2012년 설치된 스튜더 믹서. 그 옆에는 콘서트홀 곳곳에 설치된 HD급 카메라 5대로부터 송출되는 화면을 보여주는 모니터와 비디오믹서가 놓여있다. 이곳이 1988년 개관 이후 거의 매일 수많은 연주를 기록해온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주조정실이며 문성욱 음향감독 일터다.

 

문 감독은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콘서트홀 안에서 소리와 관련된 모든 일을 책임져야 한다”며 “때로는 연주자가 어디에 앉아야 하는지도 상의한다. 마이크는 어디에 놓을지 등을 결정하고 리허설이 시작되면 가녹음을 하다 문제가 있을 때는 마이크 위치를 바꾼다든지 조정한 후 공연이 시작되면 본격적 녹음을 하는 게 일상 업무”라고 설명했다.

 

음향은 기계공학을 전공한 대학에서 처음 접한 후 이를 대학원에서 전공하기로 결심하면서 문 감독 일생의 업(業)이 됐다. 대학원 마지막 학기 때 문 감독을 눈여겨본 지도교수가 “논문 쓰며 소일하기 좋은 ‘알바자리’가 있다”며 소개해준 게 예술의전당과 첫 만남. 2002년 초부터 조명·음향 작업을 보조하며 여러 일을 거들다 1년이 지났을 무렵 “콘서트홀에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은 게 지금에 이르렀다. 문 감독은 “아르바이트에서 시작해서 각종 비정규직·계약직 등 예술의전당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직급을 거쳤다”고 말했다.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데 따른 불안과 다른 후발 공연장으로 이직 고민 여부 등에 대해 묻자 “지금은 좋은 곳이 많이 생겼지만 그래도 클래식 세계에서 우리나라 최고인 예술의전당에서 음향 일을 할 수 있다는 게 마냥 좋았다”고 말했다.

 

예술의전당이 자체 제작한 앨범들. 맨 왼쪽이 지난해 첫 일반 판매한 노부스 콰르텟 앨범 

문 감독이 푹 빠진 클래식 녹음의 묘미는 공간을 울리는 소리에서 나온다. 대중음악은 심지어 악기 자체에 녹음잭(커넥터)을 꽂아가며 마치 눈앞에서 연주하는 것처럼 녹음하는 것을 선호한다. 반면 클래식 녹음은 무대에서 나온 소리를 객석에서 듣는 것처럼 공간감 있게 녹음하는 데 주력한다. 문 감독은 “클래식은 공간을 울리는 소리가 중요하게 사용된다. 워낙 몇백년전부터 확성없이 교회 등 건물안에서 연주가 이뤄졌기 때문에 공간의 건축 음향이 중요한 요소”라고 설명했다.

 

또 요즘 대중음악은 각 악기 연주를 따로 녹음한 후 후작업으로 합치는 데 비해 클래식 녹음은 특정 악기만 따로 녹음하지 않는다. 가장 규모가 큰 오케스트라 녹음의 경우 통상 콘서트홀 천정에만 12개 정도의 마이크가 설치돼 객석 반응까지 담는다. 또 현악기군 4개, 목관악기군 4개, 금관악기군 4개, 팀파니 2개 등 주요 악기군별로 별도 마이크가 배치되는데 많을 때는 40여개에 달한다. 이 모든 마이크에서 보내진 음원은 각각 별도의 채널, 디지털 파일 형태로 저장돼 음반 제작 등에 사용되는데 최상의 녹음 결과를 만드는 게 문 감독 일이다.

 

문 감독은 “클래식은 여러 악기가 함께 녹음되기 때문에 잘못되면 오로지 연주를 다시 하는 수밖에 없다”며 “클래식 음반 녹음이 보통 한 번에 ‘쫙’한다고 여겨질 수 있는데 정말 많이 쪼개져 있다. ‘테이크(Take)’가 1000개까지 간다. 심할 때는 음표 하나를 쪼개서 녹음한 후 합친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이는 실황음반 역시 마찬가지라고 한다. 실황 공연 전 리허설을 녹음하는 이유가 실황에서 문제있는 부분을 대치하기 위해서다.

 

문 감독은 “클래식 녹음은 사실 (후작업에선) 손을 거의 안 대는 게 원칙”이라며 “물리적으로 마이크를 어느 거리에 어떻게 놓느냐로 거의 완성된다. 두번째로 소리 크기를 조정하는 식”이라고 설명했다. 다양한 후보정 효과를 사용하는 대중음악과 달리 클래식은 공간의 제약이나 연주자 능력의 제약으로 어쩔 수 없는 경우를 빼면 원칙적으로 녹음 결과에 인위적 조정을 하지 않는다는 설명이다. “사실 잘 만든 음반, 즉 명반은 희한하게 어디에서 무엇으로 들어도 소리가 좋습니다.”

 

콘서트홀 음향감독으로서 가장 큰 보람에 대해 문 감독은 “녹음 단추를 누르는 순간 역사를 만든다는 생각을 한다”고 말했다. “모든 공연에서 박수가 나오지만 정말 좋은 공연은 박수 소리가 다르거든요. 그런 때는 저도 이미 명연주에 동화된 상태인데 그런 연주를 기록으로 남긴 것이 굉장히 영광으로 느껴집니다. 좋은 연주를 기록으로 남기면 언젠가 다시 꺼내어져 사용될 수 있고, 객석 박수소리, 옷깃 스치는 소리 하나까지 다 같이 기록되는 것이 특별하게 느껴지는 날이 있습니다.”

 

1988년 3월 28일 열렸던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개관 공연이 대표적이다. 먼지 쌓여가는 옛날 아날로그 녹음 자료를 디지털로 변환 저장하는 작업에서 문 감독은 세기의 첼로 거장 로스트로포비치의 당시 공연 실황을 듣고 깊은 감동을 느꼈다. 30여년전 녹음에는 훌륭한 연주 끝에 마지막 네 번째 앙코르를 앞두고 객석에서 터져 나온 웃음소리와 환호성이 기록됐다. 호기심 느낀 문 감독이 문헌을 찾아본 결과 로스트로포비치가 “이번 앙코르는 오늘 밤 내내 내 등만 쳐다보고 연주를 들어야 했던 무대 뒷좌석 친구들을 향해 연주하겠다”며 무대 뒤쪽 합창석으로 몸을 돌려 연주하자 터져 나온 환호성이 생생히 기록된 결과였다. 이처럼 많은 사연이 담긴 과거 예술의전당 명연주 녹음에 디지털 변환 등으로 새생명을 불어넣어 주는 작업이 보다 활성화됐으면 하는 게 문 감독 바람이다.

녹음의 난이도는 마이크를 적게 쓸수록 어렵다. 특히 현악 사중주가 가장 어려운 편이다. 바이올린 2대와 비올라 1대, 첼로 1대만으로 최대 음악 효과를 거두는 구성이다보니 매우 민감하고 예민한 녹음이다. 그런 점에서 예술의전당 자체 앨범 제작은 지난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4중주단 노부스 콰르텟 공연 실황을 영상 및 앨범으로 제작하면서 큰 전환점을 맞았다. 문 감독은 “예술의전당 제작 앨범으로서 처음으로 일반에 발매된 음반이었다. 그만큼 많은 것을 투자한 작업이고 현재 정말 잘 나가는 노부스 콰르텟이 같이 작업해준 게 굉장히 감사한 일”이었다며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만 1년에 1000번 넘는 공연이 이뤄진다. 마음만 먹으면 휴관하는 월요일 빼고 매일 녹음을 해볼 수 있는 공간인데 정말 많은 투자가 이뤄져 음향 엔지니어도 양성되고, 시행착오를 거쳐 발전한다면 앨범 녹음으로 그래미상을 받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각오를 말했다.

 

“녹음 단추를 누르는 순간 ‘역사를 만든다’"는 생각을 한다는 문성욱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음향감독.    예술의전당 제공

일반이 지켜보는 공연은 물론 리허설까지 지켜보는 문 감독에게 최고의 공연과 지휘자, 오케스트라에 대해 물었다. 최고의 공연은 예당에서 갓 일하던 시절 객석에서 작업하다 무심결에 들은 유리 테미르카노프의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 리허설 감동이 잊히지 않는다고 했다. “오케스트라가 딱 첫 음을 냈는데 들어보지 못한 소리가 났어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서 연주를 한참 들었습니다. 무슨 곡인지 생각 안나고 느낌만 기억납니다. ‘상트’가 지금도 잘하지만 그때는 더 잘했거든요.”

 

연주 잘 하기로 정평난 교향악단은 대체로 실제 연주도 훌륭하다. 특히 잘하는 오케스트라는 연주의 셈, 여림 폭이 강렬하게 느껴지지만, 실제 녹음기기로 들어오는 소리의 진폭(다이나믹 레인지)은 크지 않은 경향이 있다는게 문 감독 경험이다. 각 악기파트가 하나의 소리로 들리도록 연주하고, 귀로 듣기에는 굉장히 강력한 대목에서도 실제 음량볼륨은 조절이 필요할 정도로 높이 올라가지않는다는 설명이다.

 

문 감독은 다양한 지휘자의 리더십도 숱하게 지켜봤다. 그는 “리허설 과정에서 오가는 지휘자와 단원간 대화를 늘 듣게 되는데 지휘자는 결국 리허설 등에서 연주자들과 소통하고 가르치고 조련하는 그 과정으로 본 공연을 지휘한다. 지휘봉 그 끝의 무게는 단원과 같이 한 시간에 실려있다”고 말했다.

 

감동은 거장만의 것도 아니다. 문 감독은 “콩쿠르 연주에서도 자극받는 날이 있다. 원숙한 연주자들이 물론 더 잘하지만 신진은 정말 열정이 있고 노장이 갖지 못한 뜨거움이 어느 순간 한계를 넘어서는 연주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또 다른 감정의 자극을 받는다”고 말했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