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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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파 악극은 장년층의 전유물?… 젊은층 사로잡은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아아아 ··· 이 어찌 기구한 운명의 장난이란 말이냐!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 ” 

 

막이 오르면 희미한 조명 아래 모습을 드러낸 해설자가 ‘변사’의 어투를 잔뜩 능란하게 구사하며 극의 배경을 무대 한가득 풀어놓는다. 해설자는 1930년대, 당시 모던보이와 모던걸이 즐겨 썼을 ‘고등 룸펜’ ‘말랑꼬리’ ‘센시티브’ ‘후렌드쉽’ 등의 단어들을 적절히 섞거나 녹여내면서, “방탄소년단(BTS)이 세상을 지배하는 이 시대에 왠 때아닌 신파 악극이야” 투덜대며 지인의 손에 이끌려 극장을 찾았을 법한 관객의 눈길과 마음 ‘낚기’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근데, 이게 쉽사리 먹혀든다. 악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연출 김순영·극단 미연)에 대한 이야기다. 

 

최근 복고풍과 감성유행을 탄 악극이 장노년층에게는 향수를, 젊은층에는 호기심을 안겨주는 ‘시대적 트렌드’로 자리매김하면서 시장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등장인물들은 뚜렷한 선과 악의 캐릭터로 심각한 갈등을 조장한다. 관객들은 선한 주인공이 핍박받는데 대해서는 연민과 동정을 보내고, 더할 나위 없이 사악한 가해자를 향해서는 강렬한 분노와 증오를 나타낸다. 아울러 ‘홍도’가 절박한 위기에 놓일 때마다 펑펑 눈물을 흘린다. 언제적 얘기냐며 고개를 가로젓겠지만 2019년 5월 현재 상황이다. 실버세대의 문화여가생활이 늘어남에 따라 부활하는 악극이 자녀들의 효도상품으로 인기다. 값비싼 호텔 디너쇼 만이 효도가 아니다.  60대 이상 부모님께 권할만한 악극이지만 자녀 세대 또한 그간 몰랐던 새로운 ‘재미’와 만나게 된다.

최근 복고풍과 감성유행을 탄 악극이 장노년층에게는 향수를, 젊은층에는 호기심을 안겨주는 ‘시대적 트렌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의 강점은 흡인력이다. 배우들의 연기력이 탄탄해서다. 등장인물들의 연기가 미흡하면 객석에서 지켜보는 이들이 오그라들기 마련인데, 그런 우려 따위를 전혀 용납하지 않는다. 베테랑 배우들의 시종일관 능숙하게 대사치는 묘미가 느긋하고 안정감 있는 관람을 보장한다.

 

출연자들의 면면은 그야말로 짱짱하다. 드라마 ‘LA 아리랑’ ‘황금물고기’ ‘맛있는 수다’ ‘고부 스캔들’, 영화 ‘두사부일체’ ‘발레교습소’, 연극 ‘오거리 사진관’ 등 자유로이 경계를 넘나들며 특유의 여성말씨로 두루 얼굴을 알린 이정섭이 ‘홍도’의 아버지 김영감을 맡아 ‘속 모르고 철 없는’ 애비 역을 능청스럽게 소화해낸다.   

 

서울연극제 주연상(1990)과 최우수연기상(1994)에 빛나는 박승태는 홍도의 시어머니로 나와 구렁이 같은 연기로 객석의 분노 게이지를 한껏 끌어올린다.

실버세대의 문화여가생활이 늘어남에 따라 부활하는 악극이 자녀들의 효도상품으로 인기다. 부모님께 권할만한 악극이지만 자녀 세대 또한 그간 몰랐던 새로운 ‘재미’와 만나게 된다.

연극과 영화, 뮤지컬 등을 딱히 구분하지 않는 ‘연기의 고수’ 정상철과 이인철도 각각 홍도 시아버지 최사장과 해설자로 등장해 극의 무게감을 더한다.

 

홍도가 몸을 의탁하는 기생집의 수장 춘홍을 맡은 우상민 한국연극배우협회 이사장의 연기는 굵은 밑줄을 그어가며 볼만 하다. 초반부 그가 ‘봄날은 간다’를 가녀린듯 강단있게 부르고 난 순간부터 관객들이 일제히 극에 흠뻑 젖어들기 때문이다. 

 

김혜영의 재발견도 반갑다. 그렁그렁한 두 눈과 극장을 휘감는 노래로 표출해 낸 김혜영표 ‘홍도’는 아무런 저항없이 관객의 가슴을 파고든다. 앞서 ‘비내리는 고모령’ ‘울고 넘는 박달재’ ‘봄날은 간다’ 등의 악극에서 얻은 경험이 몇년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자신감을 키워 그의 ‘매력’과 ‘마력’을 버전업시키는 자양분이 되었을 듯 싶다.

 

홍도의 남편 영호 역의 박용기도 주목해야 한다. 액션과 코미디, 악역으로 익숙한 그가 새롭게 선보이는 (홍도를 향한) ‘순정’은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가진 배우 박용기의 내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대목이다. 심지어 50대 후반의 그는 극중 25살 생일을 맞는 영호를 그다지 이질감 없이 거뜬히 묘사해낸다. 상대 배우를 리드해가며 유연하게 극을 끌어갈 줄 아는 그의 필살기, ‘집중력’의 발로다. 

 

영호의 옛 애인이자 약혼녀 ‘해정’으로 존재감을 나타내는 김미경은 시어머니 역의 박승태와 함께 제대로 ‘얄미운’ 앙상블을 이룬다.

악극 ‘사랑의 속고 돈에 울고’는 1930년대 시대상을 재현한다. 그 시절의 관례와 분위기를 알 수 있다.

줄거리는 알려진 그대로지만, 곳곳에 배치해 놓은 노래들이 분위기를 제 때에 자아낸다. 우리의 가요 100년을 조명하는 듯 하다. 서양 뮤지컬 저리가라할 만큼 전개속도도 빠르다.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마음에 쏙 든다. 그저 자연스레 죽죽 흘리도록 내버려 둘 뿐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정서를 개개인의 경험과 버무린 탓에 여기저기서 ‘진짜’ 눈물을 죄다 쏟아내곤 한다. 그래서 마음대로 울면서 보면 더 재밌다.

 

1936년 극단 청춘좌가 동양극장에서 초연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는 해방 전 최대 흥행작이었다. 신파극의 대표적 소재인 가정의 갈등이나 화류계의 비극을 자연스러운 일상의 대사로 녹여내면서도 기교를 부린 구성이 뛰어났다. 흥미진진한 통속성과 눈물 폭탄을 터뜨리는 ‘한’을 버무려 ‘한국 멜로드라마의 전형’을 확립한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당시 전차가 다니지 못할 만큼 관객들이 몰려들어 서대문경찰서에서 출동한 순사(경관)들이 질서유지를 위해 관객들을 ‘두들겨 팼다’고 전한다. 서울의 기생들도 떼로 몰려왔는데, 주인공 ‘홍도’와 자신을 동일시한 이들의 눈물로 극장은 매 공연마다 울음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장안의 기생들을 구경하러 온 한량들도 넘쳐났다. 홍도 역의 차홍녀, 영호 역의 황철, 그리고 작가 임선규는 어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당대 톱스타의 인기를 한껏 누렸다. 극중 노래 가사 “홍도야 울지마라 오빠가 있다. 아내의 나갈 길을 너는 지켜라”는 전국 방방곡곡에서 울려 퍼졌다. 이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여러차례 리메이크 되어 공연되면서 일명 ‘홍도야 우지마라’로 더 잘 알려지게 된 이유다.

악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 일명 ‘홍도야 우지마라’.  6월 2일까지 대학로 예그린씨어터

이번 공연은 1994년 고 김상열 작가가 쓴 대본을 원작으로 삼았다. 제자 김순영 감독이 이를 다듬어 특유의 ‘뚝심’있는 연출로 무대에 올렸다.

 

연극 ‘삼류배우’ ‘돈키호테’ ‘사랑의 방정식’ ‘서산에 해지면 달 떠온단다’ ‘연기가 눈에 들어갈 때’ 등으로 유명한 서울연극제 연기상(2007) 수상자 박호석이 홍도 역으로 번갈아 나오는 등 민충석(홍도 오빠 철수) 김현정(봉옥) 김태형(순사) 박화영(수련) 오규석(노복) 박흥열(김영감) 등이 함께 출연한다.

 

서울 대학로 예그린씨어터에서 6월 2일까지 관객을 맞는다. 평일 오후 8시, 토·공휴일 3시·6시, 일 3시.

 

김신성 기자 sskim65@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