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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日에 독도 팔아" 했다가 징역형… 42년 만에 '무죄'

1970년대 마을 잔치서 "박정희가 日에 독도 팔았다더라" / 유신 정권, 긴급조치 9호의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입건 / 징역형 확정 42년 만에 재심 '무죄'… "비로소 恨 풀었다"

우리 대법원의 일제 강제징용 배상 판결과 이에 불복하는 일본 정부의 대(對)한국 수출 규제 등 경제보복 조치로 한·일 관계가 1965년 국교 정상화 이후 최악이다. 갈등의 배후엔 국교 정상화의 전제가 된 한·일 청구권 협정을 둘러싼 양국의 견해차가 있다. 이런 가운데 유신정권 시절 한·일 청구권 협정과 관련해 정부를 비난했다는 이유로 징역형을 선고받은 인사가 42년 만에, 또 사후(死後) 11년 만에 법원 재심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1965년 6월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한·일 국교 정상화에 즈음한 대국민 담화문을 발표하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마을 잔치에서 "박정희가 日에 독도 팔았다더라"

 

1925년생인 A씨는 경찰공무원 등으로 일하다 퇴직한 뒤 1975년부터 충남 지역에서 한 중앙일간지 보급소장으로 일했다. 4년간 마을 이장을 지내기도 한 그는 동네 여론을 주도하는 인물들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77년 3월 어느 날 마을에서 잔치가 열렸다. 20여명이 모여 음식을 먹는 도중 독도가 화제에 올랐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일본을 상대로 비난이 쏟아졌다.

 

A씨의 지인 B씨는 “확실히 독도는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 땅인데 일본X들이 생떼를 쓰고 있다”며 “옛날에 이완용이가 일본X에게 팔아먹었다 해도 우리나라 땅이 틀림없다”고 말했다.

 

이를 받아 A씨가 “항간에 들리는 이야기로는 독도는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에 팔아먹었다더라”고 이야기한 것이 문제가 됐다.

 

A씨의 말은 1965년 한·일 국교 정상화 교섭 당시 우리 측 대표였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독도는 한국 땅’이란 점을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서둘러 협정을 체결한 것과 관련이 있다. 이를 두고 “일본에서 청구권 자금을 받는 게 급한 나머지 독도 문제는 어영부영 다뤘다”는 비판이 국내에서 거세게 제기된 바 있다.

 

심지어 한국 측 협상팀의 입에서 “차라리 독도를 폭파하고 싶다”는 극언까지 나왔다는 소문도 무성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독도를 일본에 팔았다’는 취지의 발언은 그 연상선상에 있는 것인데, A씨가 단정적으로 말한 것도 아니고 그냥 ‘이런 얘기도 있더라’ 하고 전달한 수준에 불과했다.

 

독도 전경. 1965년 체결된 한·일협정은 ‘독도는 한국 땅’이란 점을 명시하지 못해 아직까지도 비판을 받고 있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유언비어 유포'로 징역형… 42년 만에 재심 '무죄'

 

하지만 서슬 퍼런 유신정권이 A씨를 그냥 두었을 리 없다. 마을 잔치가 끝나고 경찰에 입건돼 조사를 받은 A씨는 대통령 긴급조치 9호의 유언비어 유포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1977년 9월 1심은 공소사실 전부를 유죄로 인정해 A씨에게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했다. 같은 해 12월 2심은 “형량이 너무 과중하다”며 1심을 깨고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 자격정지 2년으로 낮췄다. 결국 항소심 판결이 그대로 확정됐고 A씨는 꼼짝없이 ‘전과자’의 낙인이 찍혔다. 그는 2008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검찰은 2017년 5월 문재인정부 출범 후 긴급조치 9호 피해자들 구제에 나서며 이미 사망한 사람의 경우 검사가 그를 대신해 법원에 재심을 청구하도록 했다. 검찰이 A씨 사건 재심을 청구하고 지난해 6월 법원이 이를 받아들임에 따라 재심 절차가 본격화했다.

 

4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고법 형사9부(부장판사 한규현)는 최근 A씨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9호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나치게 제한, 헌법상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해 위헌·무효”라며 “따라서 A씨를 유죄로 본 원심 판결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고 판시했다.

 

이로써 A씨는 유죄 선고 후 꼭 42년 만에, 또 사후 11년 만에 무죄가 확정돼 비록 하늘나라에서나마 명예를 회복하고 한(恨)도 풀었다. 1965년 한·일 협정이 드리운 그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한국인들은 이 소식에 가슴이 더욱 먹먹해질 뿐이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