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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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보다 무서운 가해자와 갇혀” 격리조치에 여성폭력 심화

코로나19 이후 중남미 가정폭력 신고 급증
페루의 여성폭력 반대 배너. AFP연합뉴스

여성살해(femicide) 등이 사회적 문제가 될 정도로 여성 인권이 낮은 중남미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시대는 최악의 한 페이지를 또 한 번 쓰고 있다. ‘집이 곧 지옥’인 상황에서 자가격리조치는 여성들을 보호는커녕 더 위험하게 만든다. 가정폭력 신고와 살해 사례가 급증했고, 성차별은 심화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르헨티나 여성단체 무말라(MuMaLa) 관계자는 21일(현지시간) AFP 통신에 “코로나보다 더 무서운 가해자와 갇힌 여성들은 격리조치로 지옥에 몰린 상태”라고 밝혔다. AFP에 따르면 아르헨티나에서 격리조치 시행 후 20일간 18명의 여성이 배우자나 전 배우자 등으로부터 살해됐다. 가정폭력 신고는 40% 가까이 늘었다.

 

아르헨티나에서 전 국민 강제 격리조치가 시행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지난달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는 40세 여성이 7세 딸과 함께 살해돼 집 마당에 파묻힌 채 발견됐다. 용의자는 동거남으로 다툼 끝에 이들을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멕시코, 브라질, 칠레, 페루 등 중남미 다른 나라들의 상황도 비슷하다. 코로나19 이후 여성폭력 희생자가 크게 증가했다. 기존에도 심각했던 여성폭력 문제가 위기 국면에 더 심각해진 것이다. 집 안에서 물리적으로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가정 내 남편의 음주 등도 늘어나면서 일어난 결과다.

 

멕시코의 한 여성단체에 따르면 자택격리 권고가 내려진 이후 여성폭력 피해자들의 긴급 신고 전화가 60% 늘어났다. 멕시코 내 여성폭력 실태를 연구하는 마리아 살게로는 격리 시작 후 멕시코 전역에서 200명가량의 여성이 살해된 것으로 추정했다.

 

칠레의 격리 지역 중 하나인 수도 산티아고의 부촌 프로비덴시아에서도 가정폭력 신고가 500% 급증했다고 AFP는 전했다. 칠레 당국은 격리조치 후 음주가 늘고 정신건강이 악화하면서 남성들의 불안과 우울, 가정폭력이 늘어났다고 밝혔다.

 

여성단체 만남의집의 아다 리코는 AFP에 “매일 여성이 집에서 파트너에게 맞거나 학대를 당한다”며 “평소라면 법적 조치를 돕지만 요즘엔 피해 여성을 집에서 탈출시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전했다.

 

프란치스코 교황. 바티칸 AP=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과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총장 등도 코로나19 이후 늘어난 가정폭력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를 낸 바 있다. 구테흐스 총장은 “불행하게도 많은 여성과 소녀들이 가장 보호받아야 할 자신들의 집에서 폭력에 노출돼 있다며 가정폭력 휴전”을 촉구했다.

 

거리로 나오는 사람 수를 제한하기 위해 ‘남녀 홀짝 외출제’를 시행한 것도 남미 국가들인데 이 또한 성차별을 심화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성별 외출 2부제는 남자들은 홀숫날, 여자들은 짝숫날에만 밖에 나올 수 있도록 한 조치로 페루, 콜롬비아, 파나마 등이 시행했다. 

 

그러나 외신에 따르면 이 정책 시행 뒤 당황스러운 모습이 연출됐다. 여성 외출이 허용된 날에는 식료품점마다 긴 줄이 형성된 반면 남성 외출이 허용될 날에는 식료품점은 한가하고, 유흥가 등 거리만 북적였다는 것이다.

 

여성들이 나오는 날마다 식료품점에 인파가 몰리면서 결국 페루는 남녀 홀짝 외출제를 포기했다. 페루 정부 관계자는 “처음부터 일주일 중 이틀만 남성 외출을 허용하고, 나머지 4일은 여성 외출을 허용하는 게 나았을 것”이라고 밝혔다.

 

코로나19라는 비상시국에도 식량과 생필품을 사는 일은 여성의 몫이었고, 남성들은 주로 술집으로 향했다는 성차별적 현실을 본의 아니게 드러낸 셈이다.

 

정지혜 기자 wisdom@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