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죄의식 없이 침 뱉고 때리고… ‘솜방망이 처벌’ 비웃듯 번져 [심층기획]

여성 노린 '묻지마 범죄'
‘여성 혐오범죄’ 단순 경범죄 취급하는 韓

특정 약자 노린 ‘묻지마 범죄’ 빈번
국내 가중처벌 법적 근거 마련 안 돼

창원서 30대 男 커피 뿌리고 음란행위
서울선 20대가 모르는 여성 뒤통수 쳐
“사회 불만” “우울해서”… 재미로 범죄

수사기관·사법부 인식·시스템 뒤처져
대부분 경범죄로 분류 처벌 수위 약해
美·獨, 혐오범죄는 가중처벌 요인 인정

전문가들 “사소한 범죄, 큰 범죄 이어져
처벌 수위 낮을 땐 모방범죄 가능성 커
치러야할 대가 더 크다는 메시지 줘야”

서울 광화문 인근 직장에 다니는 박아름(27·여·가명)씨는 지난 2월 어느날 밤 이후로 늦은 밤에는 버스를 타지 않는다. 인적이 드문 버스정류소에서 낯선 남자로부터 위협을 당한 공포를 두 번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서다.

 

당시 야근을 마치고 버스를 기다리던 박씨에게 다가온 한 젊은 남성은 갑자기 박씨의 얼굴 쪽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얼굴을 맞지는 않았지만, 바로 앞을 스쳐 지나는 주먹에 박씨의 심장은 철렁 떨어졌다.

 

박씨는 “눈앞으로 주먹이 지나가서 맞는 줄 알았다. 너무 놀라 소리도 못 냈다”며 “그 남성은 내가 겁먹은 게 재밌는 듯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이런 일을 처음 해본 게 아닌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황급히 정류소를 떠난 박씨는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다. 그는 “아무 잘못도 안 했는데 갑자기 맞을 수 있었다는 생각에 한동안 생활하기 어려울 만큼 겁에 질려 있었다”며 “그 사람한테는 장난이었을지 몰라도 나에겐 일상이 흔들리는 공포였다”고 말했다. 놀란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지만, 폭행을 당한 것이 아니었기에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었다.

 

◆죄의식 없이 침 뱉고 때리고… ‘솜방망이 처벌’ 비웃듯 번져

 

지난달 경남 창원에서는 30대 남성 A씨가 경찰에 붙잡혔다. 그는 밤에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 버스정류장 등에 혼자 앉아 있는 여성만 골라 커피 등 음료를 뿌리거나 침을 뱉은 혐의를 받고 있다. 이틀 동안 발생한 피해자만 15명으로, 대부분 10대 고등학생이나 20대였다. 또 여성 3명 앞에서 바지를 벗고 성기를 노출한 혐의도 받고 있다. 그는 과거 강제추행으로 처벌받은 전력을 의식, 일부러 직접적인 신체 접촉을 하지 않은 것으로 조사됐다. A씨는 경찰 조사에서 “직장을 잃고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외출이 어려운 상황에 불만이 커져 약자인 여성을 대상으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여성을 대상으로 한 일명 ‘묻지마 범죄’로 불안감을 호소하는 여성이 늘고 있다. 길을 지나는 여성에게 침을 뱉거나 뒤통수를 때리는 등 별다른 이유 없이 여성을 괴롭히는 범죄가 연이어 발생하지만 가벼운 경범죄로만 처벌될 뿐이다. 최근 스토킹 처벌법을 따로 만든 것처럼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범죄 역시 다른 처벌기준을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여성만’ 노리는 연쇄 경범죄 잇따라

 

12일 경찰 등에 따르면 최근 여성만 골라 ‘테러’를 하는 범죄가 잇따르고 있다. 지난해 8월에는 서울 중랑구 일대에서 여성 23명에게 침을 뱉고 소리를 치며 위협한 20대 남성 B씨가 붙잡혔다. 피해자 중에는 임신부도 있었다. B씨는 자전거를 타고 가다 젊은 여성이 보이면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 피해자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고 침을 뱉거나 소리를 치고 도망쳤다. 도망치면서 뒤돌아서 피해자가 놀란 모습을 확인하기도 했다.

 

대학생인 B씨는 학업 스트레스 등을 풀려고 그런 짓을 한 것으로 조사됐다. 우연히 지나가는 여성에게 소리를 쳤는데 놀란 여성이 반응하는 것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는 것이다. 그는 “연약한 여자들에게는 침을 뱉어도 잡히지 않을 것 같았고, 남자에게 침을 뱉으면 내가 피해를 보게 될 것 같았다”고 말했다. 서울 북부지법은 지난 1월 B씨에게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이밖에 인천지법은 지난해 11월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묻지마 침 뱉기’를 한 30대 남성 C씨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그는 2019년 6월부터 지난해 5월까지 길을 가던 20대 여성 4명에게 가래침을 뱉은 혐의(폭행)로 재판에 넘겨졌다. C씨는 “재미가 있어 장난으로 이 같은 행동을 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올해 1월에는 서울 강남역 인근에서 20대 남성이 일면식도 없는 여성 4명의 뒤통수를 때리고 달아났다가 경찰에 붙잡혔다.

 

길을 가다 아무런 이유 없이 봉변을 당한 피해자들은 트라우마가 남을 정도로 큰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지만, 피의자들의 범행 이유는 별다를 것이 없다. 그저 ‘사회에 불만이 있어서’, 혹은 ‘우울해서’ 재미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범죄는 사회 윤리체계 붕괴를 드러내는 현상 중 하나라고 분석한다. 이백철 경기대 교정보호학과 교수는 “최근 약자를 대상으로 폭력적 성향을 강하게 발현하는 경우가 많다. 사회 전반의 교양 수준과 윤리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설명했다.

 

여성들의 불안감도 높다. 통계청과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발표한 ‘2020 통계로 보는 여성의 삶’에 따르면 범죄로부터 안전하지 않다고 느끼는 여성은 전체의 57.0%로 같은 응답을 한 남성 비율(44.5%)에 비해 12.5%포인트 높았다. 직장인 이모(35)씨는 “길을 가다 모르는 여성에게 뭘 뿌리거나 침을 뱉는 사람들이 잡혔다는 기사를 보면 남의 일 같지 않다”며 “나도 언제 그런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하다. 여성 대부분이 이런 불안감을 가지고 일상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여성혐오 범죄이지만 경범죄로만 처벌

 

문제는 이런 범죄 상당수가 단순 경범죄로 분류돼 약한 처벌로 끝난다는 점이다. 단순히 지나가는 사람 모두에게 음료를 뿌린 진짜 ‘묻지마 범죄’와, ‘늦은 밤 혼자 있는 여성만 골라’ 음료를 뿌린 것은 본질적으로 다른 범죄다. 그러나 한국의 법체계는 특정 약자 집단을 노린 혐오범죄를 가중처벌할 법적 근거가 없다. 단순히 결과인 ‘음료를 뿌린 것’에만 집중할 뿐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직접적인 신체 접촉 없이 소리를 치거나 위협을 가한 경우 범죄 입증도 쉽지 않고, 혐의가 인정돼도 10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그친다. 여성들만 골라 옷에 침을 뱉거나 스타킹에 먹물을 뿌리는 행위 역시 옷이나 스타킹 훼손에 따른 재물손괴죄로만 처벌할 수 있다. 피해 여성들은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만 성희롱 혐의를 적용하기도 어렵다.

 

반면 미국과 독일 등에서는 혐오범죄 예방법을 제정하거나 혐오범죄를 가중처벌 요인으로 인정해 엄벌하고 있다. 혐오범죄를 공식 범죄 통계의 유형으로 분류해 집계하기도 한다. 김다슬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 정책팀장은 “불특정 다수의 여성을 위협하거나 폭행하는 범죄는 여성혐오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여성들도 잘 알고 있다”면서 “이런 인식 변화 속도를 수사기관이나 사법부는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여성 등 특정 집단만을 노린 범죄는 묻지마 범죄가 아닌 혐오·증오범죄로 규정하고 처벌기준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근 스토킹 범죄에 대한 처벌법을 마련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스토킹 범죄 역시 과거에는 별도의 처벌 규정이 없어 경범죄처벌법이나 재물손괴 등의 혐의만 적용됐다. 이 때문에 스토킹 범죄를 범죄로 보지 않는 사회적 인식이 높다는 지적이 많았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약자를 상대로 정체불명 액체를 뿌리거나 침을 뱉는 것은 꽤 심각한 문제다. 일종의 패턴화돼 나타나는 증오·혐오범죄”라며 “더 큰 범죄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심각성을 인지하고 처벌기준을 상향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윤호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도 “약자 겨냥 범죄는 처벌이 약할 경우 모방범죄의 가능성도 높다”며 “처벌 수위를 높여 범죄의 쾌락보다 치러야 할 대가가 더 크다는 메시지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예쁘게 입으니… 경찰조차 범죄인식 없어"

 

“먹물테러 그 자체보다 더 힘들었던 건 사건 이후의 조사 과정과 약한 처벌 결과였습니다. 처음 신고했을 때 경찰관이 ‘아가씨가 그렇게 옷을 예쁘게 입고 다니니 그런 일을 당하지’라고 말할 정도로 경찰조차 심각한 범죄라는 인식이 별로 없었으니까요.”

 

2017년 10월 서울 신촌 거리를 걷던 중 모르는 남성으로부터 다리에 먹물이 뿌려지는 피해를 본 ‘신촌 먹물테러’ 피해자 A씨는 사건 이후 긴 좌절의 시간을 보냈다. 사건 직후 피해자가 자신만이 아닐 거라 직감한 A씨는 학교 커뮤니티를 통해 다른 피해자를 수소문했고 4명의 피해자를 더 찾아냈다. 피해자 5명이 함께 경찰에 신고했고 범인이 붙잡혔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피해자들이 느낀 공포감과 수사기관, 여론의 인식 차이가 컸다. 먹물을 맞은 피해자들이 화장실 등서 스타킹을 갈아 신으면 버리고 간 스타킹을 가해자가 가져가는 등 성적인 의도가 다분한 사건이었지만, 심각한 피해가 아니라는 이유로 피해자들은 ‘별일도 아닌데 유난 떠는 사람들’이 됐다. 맨 다리에 먹물을 맞은 A씨의 경우엔 그나마 폭행죄를 적용할 수 있었지만 스타킹에 먹물을 뿌린 경우 스타킹을 훼손했다는 재물손괴죄 외에는 적용할 혐의가 없었다. 결국 범인은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그로부터 3년 반가량 지났지만 유사한 범죄가 사라지기는커녕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 A씨는 12일 세계일보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제대로 된 처벌 없이는 약자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혐오범죄가 계속 생길 수밖에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A씨가 겪은 사건과 유사하게 지난 2월 경남 창원에서는 여성들만 골라 커피 등 액체를 뿌리는 ‘커피 테러’ 사건이 발생했다.

 

A씨는 이 같은 범죄가 끊이지 않는 가장 큰 원인으로 ‘경미한 처벌’을 꼽았다. A씨는 “먹물테러 때 성적인 의도가 다분했기에 성범죄로 보고 처벌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며 “경찰에선 ‘신체적 접촉이 있었던 게 아니라 성범죄 조항을 적용할 수 없다’고 했다”고 전했다. 범인에게는 폭행죄와 재물손괴죄가 적용됐지만 폭행죄의 경우 별다른 상해가 발생한 게 아니고, 재물손괴죄도 손상된 재물(스타킹)의 액수가 작아 처벌이 어려웠다. A씨는 “범죄라는 인식 자체가 약해 조사과정에서도 답답함을 느꼈고 당시 관련 기사 댓글에도 ‘별것도 아닌데 신고하냐’는 반응이 많아 충격을 받았다”고 떠올렸다.

 

A씨는 “혐오범죄를 처벌 강화만으로 완전히 해결할 순 없을 거라는 건 알지만 제대로 처벌하면 열 번 일어날 게 두세 번으로 주는 효과는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비슷한 사건들이 반복되지만 매번 흐지부지 넘어간다”면서 “이런 상황에선 경각심이 생기기 어렵고, 여성들만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 살 수밖에 없다”며 보다 실질적인 대책 마련을 바랐다.

 

박지원·이지안 기자 g1@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