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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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왕설래] 파이어족

‘파이어(FIRE)족’은 경제적 자립(Financial Independence)을 이뤄 회사를 일찌감치 그만두는(Retire Early) 이들을 말한다. 모든 직장인의 로망일 것이다. 지난 1월8일 아마존에 사표를 낸 미국인 제이슨 드볼트는 트위터에 이 한 줄을 남겼다. “39세에 은퇴한다. 미래 수익을 위해서 지분을 팔지 않을 것.”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던 그는 전기차 회사인 테슬라 주가가 역대 최고가를 찍자 사표와 함께 트위터에 ‘1194만4889달러’(약 131억원) 인증샷을 남겼다. 2013년 주당 7.5달러에 산 주식이 880달러로 117배나 폭등한 것이다. 돈벼락을 맞은 그가 파이어족 대열에 합류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터이다. 먹고살 만큼 충분한 돈이 있는데 상사 눈치를 보며 직장생활을 이어가고 싶은 이가 얼마나 될 것인가.

‘근검절약해 지출 줄이기, 부업 등으로 최대한 소득 늘리기, 최대한 많이 저축하기, 현명하게 투자하기.’ 파이어족 카페에는 꿈을 이루기 위한 방법이 자세히 소개돼 있다. “차근차근 준비한다면 실현 불가능한 꿈이 아니다”라며 서로 의지를 북돋워준다. 1990년대 미국에서 처음 등장한 파이어족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젊은 고학력·고소득 계층을 중심으로 전 세계로 확산됐다. 30대 말이나 40대 초까지 은퇴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20대부터 수입의 70~80% 이상을 저축하는 극단적 절약으로 돈을 모은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내일을 걱정하느라 소중한 오늘의 행복을 잃지 말자는 ‘욜로(YOLO)’족과 대비된다.

가상화폐·주식 투자로 35억원을 번 뒤 3년 다닌 직장에 미련없이 사표를 던진 29세 청년 이야기가 화제다. 그의 포트폴리오는 60%가 비트코인과 이더리움, 30% 주식, 10% 현금으로 이뤄졌다. 대출 1억원 등 2억3000만원의 투자금은 1년 만에 15배가 넘는 수익을 안겨줬다. 취업난으로 고통받는 우리 20대는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한 세대 전체가 ‘벼락거지’가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절망에 빠진 이들이 가상화폐·주식 투자로 벼락 부자가 된 또래의 스토리에서 더 박탈감을 느꼈을 것을 생각하니 씁쓸해진다.

김환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