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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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민호의문학의숨결을찾아] 아버지의 사랑도 깊고 그윽하다

대학시절 무척도 속 썩여드렸는데…
집 가는 길 케이크 하나 들고 간다

대전으로 가는 열차 안에서 비로소 오래 들고 다닌 소설 원고를 펴든다. 양평 하고도 서종면 문호리에 ‘잔아문학관’을 연 김용만 선생은 태생이 부여. 내가 한 달째 출력만 해놓고 들고 다니는 원고는 ‘부여 찾아 구만리’, 하면 당장 ‘엄마 찾아 삼만리’가 떠오른다.

고향 찾는 일은 엄마 찾는 일보다도 멀고 힘들어 구만리나 된다고 했나? 옛날부터 지리적 거리감은 심정의 거리와 같은 것이라 했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

한참 첫 사랑 연인들이 오랜 세월의 격절을 거쳐 현재에 살고 있는 얘기를 읽는데 전화가 걸려온다.

요즘 쓰던 휴대폰이 못 쓰게 되는 바람에 새로 만들기는 했는데 전화번호는 옮겨 놓지를 못했다. 두 번이나 온 것을 놓쳤다. 세 번째 받고 보니 지리산 속 문학관을 짓고 사는, 시조 시인 장순하 선생 자제분이시다.

내가 말요. 늘 다니는 음식점들도 있는데 코로나를 걸리기를 어디서 걸린 줄 아시우? 하하. 우체국에 물건 부치러 갔다가 걸릴 게 뭐요.

얘기인즉슨 이 시조 시인 아드님이 코로나19에 걸려 자가격리 사흘째라는 것이다.

언젠가 지리산 문학관 쪽에 갔다가 사봉 장순하, 그 “눈보라 비껴 나는 ㅡㅡ전ㅡㅡ군ㅡㅡ가ㅡㅡ도ㅡㅡ”로 시작되는 시조로 널리 알려진 선생을 뵈었다. 1928년생이시니 지금 벌써 90세를 훌쩍 넘으셨을 텐데, 그때 아직 정정하셨다.

이 어른과 아드님께 생각이 미치자 나는 다시 당년 89세에 이른 아버지 생각이 난다. 요즘 부쩍 쇠약해진 아버지는 나를 보실 때마다 옛날 일들을 자주 말씀하신다.

갓난아잇적에 일찍 어머니를 잃고 계모 밑에서 성장한 아버지는 국민학교 졸업하고 밭일이나 하며 지내셨다고 한다. 몇 년이나 늦게 중학교엘 들어가 월반을 하고 고등학교는 태안에서 배편으로 인천으로 가셔서 공고를 다녔다고도 하셨다.

요즘 다 큰 자식을 한강에서 어이 없게 잃어버린 아버지의 슬픔이 사람들 가슴을 아프게도 하던데, 그러고 보면 아버지의 사랑도 어머니의 사랑만큼이나 깊고 그윽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는 한 번도 매를 맞아본 적이 없다. 솔출판사 대표 평론가 임우기 선배가 고등학교 때 아버지한테 배웠다고, 체육시간에 축구를 할 때면 공부 못하는 학생이나 잘하는 학생이나 차별없이 대하셨다고, 한 번도 학생들한테 손찌검을 하지 않으셨다고 한 것도 다 통하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대학 시절에 나는 이 인자한 아버지 속을 무척도 썩여드렸다. 대학은 무시로 휴학하기 일쑤였고 사는 주소도 안 알려 드리고 연락을 끊고 지내기도 했다.

2학년 때는 무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 한 달 만에 나와 휴학하고 집에 내려가니 아버지께서 내 책들을 마당에 수북이 쌓아놓고 다 태워버려야 한다고 하시는 것이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현대판 ‘분서갱유’였다고 웃지만 장학사 신분의 아버지로서는 심각한 고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대전역에 내리면 걷는 것이 좋다. 무심코 걷던 걸음은 나를 중앙로 성심당 제과 쪽으로 데려간다. 기왕이면 케이크도 좋겠다, 하고 생각하는데 전화가 걸려와 보니 이번에는 아들이다. 멀리서 아들은 내게 영상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제과점에서 나오자 이제 날은 저물었다. 집에 바로 들어가면 어머니가 밥을 새로 지으셔야 할 판이다.

어디서 저녁을 먹어야 하나? 고향이나 다름없는 대전 중앙로에서 나는 잠깐 길을 잃고 한 끼분의 저녁식사를 걱정하다, 큰길 건너편 오래된 ‘진로집’에서 심심한 칼국수 한 그릇으로 때우기로 한다.

 

방민호 서울대 교수·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