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윤석열 검찰총장의 사퇴로 차기 대권 구도가 요동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윤 총장의 조기사퇴가 차기 대선뿐 아니라 대선 전초전 격인 다음 달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고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국민의힘 등 야권에서는 윤 총장이 ‘반문(반문재인)’뿐 아니라 문재인정권에 대한 중도층의 견제 심리를 결집시키는 구심점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여권 인사들은 내심 윤 총장의 정치적 영향력을 경계하면서도 겉으로는 ‘찻잔 속 태풍’에 그칠 것이라며 의미를 축소하고 있다.
◆윤 총장, 중도층 文정부 견제 심리 구심점 될까
◆4·7 보궐선거, 윤 총장 차기 대권주자로서 정치적 시험 무대될 듯
정치 경험이 전무한 윤 총장이 만약 차기 대선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라며 그 역시 이번 선거에서 자신의 정치적 역량과 존재감을 보여줘야 할 필요성이 있다. 이번 보궐선거가 그의 첫 정치 무대 데뷔전이자 시험대가 될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이유이기도 하다.
윤 총장은 그간 현직 총장 신분으로 이재명 경기도지사와 민주당 이낙연 대표와 함께 ‘대권주자 빅3’로 불리며 여느 야권 대권주자들보다도 높은 지지율을 받아왔다. 특히 추미애 전 법무장관과 윤 총장의 갈등이 절정에 달하던 지난해 말에는 여야 주자를 통틀어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각을 세우던 추 전 장관의 퇴장과 연초 문재인 대통령이 윤 총장을 “문재인정부의 검찰총장”이라고 발언한 이후 지지율 하락세가 감지됐다. 윤 총장은 이날 발표된 여론조사(엠브레인퍼블릭·케이스탯리서치·코리아리서치·한국리서치가 지난 1∼3일 실시,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포인트)에서 9% 지지율을 기록해 이재명 경기도지사(27%)와 민주당 이낙연 대표(12%)에 이어 3위를 기록했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야권 내 눈에 띄는 대권주자가 전무한 상황에서 윤 총장이 본격적인 대권행보를 걷게 되면 대권구도 판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윤 총장은 이념적으로 중도, 지역적으로 영남과 충청을 흡수할 수 있어 여권으로선 위협적 존재다. 그간 이재명 경기지사를 지지해온 야권 내 반문재인 여론이 이 지사가 아닌 윤 총장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 반대로 위기감을 느낀 친문(친문재인)의 결집도도 높아지면서 민주당 내 대권구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때리는 與… “尹, 피해자 행세 뒤 사퇴 계산”
윤석열 검찰총장이 4일 사퇴를 공식화하자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윤 총장을 ‘정치검사’라며 비난하고 나섰다. 현직 검찰총장과 갈등을 빚어 다음 달 서울·부산시장 보궐선거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해 온 여권은 윤 총장이 사의를 공개적으로 밝히자 참았던 불만을 한꺼번에 터뜨렸다. 윤 총장 사퇴의 직접 계기가 된 중대범죄수사청(중수청)법 발의 시점에 대해선 “특정하지 않았다”며 한발 물러섰다.
민주당 허영 대변인은 이날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브리핑을 통해 “얻은 건 정치검찰의 운명이요, 잃은 건 국민의 검찰이라는 가치”라고 했다. 허 대변인은 “국민의 신뢰를 받는 기관이 될 때까지 검찰 스스로 개혁 주체가 돼 중단 없는 개혁을 하겠다던 윤 총장의 취임사는 거짓됐음이 드러났다”고 했다. 그러면서 “이제 ‘정치인 윤석열’이 어떻게 평가받을지는 오롯이 윤석열 자신의 몫”이라고 했다.
윤 총장은 이날 정계 진출 여부를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당내에선 윤 총장의 대선 출마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재임 기간 윤 총장과 충돌했던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은 이날 라디오 방송에서 “그분(윤 총장)의 정치 야망은 이미 소문이 파다했다”며 “이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는 피해자 모양새를 극대화한 다음에 나가려고 계산을 했던 것 같다”고 했다. 이른바 ‘추·윤 갈등’으로 윤 총장의 정치적 위상을 높여준 것 아니냐는 물음엔 “제가 키웠다면 적어도 제 말은 잘 들어야 하는데 국회에서 ‘장관의 부하가 아니다’라고 당당하게 얘기했다”고 했다.
한 핵심 의원은 “보궐선거를 앞두고 판을 흔들고 영향력을 최대화시켜서 정치하겠다는 것”이라며 “지금까지 해온 게 검찰을 위한 게 아니라 자기 정치 목표를 위한 것이라고 의심받을 것”이라고 했다. 한 중진 의원은 “검찰총장이 곧바로 정치에 뛰어들었다는 건 총장 직분을 활용했다는 것이어서 악영향이 클 것”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중진도 “윤 총장 입장에선 지금 타이밍이 좋다. 탄압받는 것처럼 보이는 시점”이라며 “전날 보수의 본원인 대구를 간 것부터가 정치적 행보다. 굉장히 의도적이다”라고 주장했다.
잠재 대선 후보인 이낙연 대표는 국회에서 윤 총장 사퇴 관련 입장을 묻는 취재진에 “생각을 한 뒤에 말씀드리겠다”며 답변을 회피했다. 이후 외부 일정에서는 기자들한테 “검찰개혁은 흔들림 없이 할 것”이라면서도 윤 총장의 대선 출마 가능성 등에 대해선 “할 말이 없다”고 했다.
민주당은 윤 총장에 대한 비난을 쏟아내면서도 중수청법 발의 시점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당내 검찰개혁특위 오기형 대변인은 이날 국회에서 법안 발의 시점을 묻는 기자들에게 “특정하지 않았고 논의를 계속하겠다”며 “논의 결과물이 나오면 하겠다”고 했다.
◆껴안는 野… “文 폭주 브레이크 없어졌다”
국민의힘은 4일 윤석열 검찰총장의 사퇴 발표에 “문재인정부가 결국 윤 총장을 몰아낸 것”이라며 현 정부에 날카로운 비판을 퍼부었다. 또 “문재인정권의 폭주를 막을 마지막 브레이크가 없어졌다”며 개탄의 목소리도 쏟아졌다. 그러면서도 정치권에선 사실상 윤 총장의 정계 진출이 임박했다는 관측이 나오면서 야권 정계개편의 가능성이 고조되고 있다.
국민의힘 배준영 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이같이 말하며 “대한민국의 상식과 정의가 무너진 것을 확인한 참담한 날이다. 정권 핵심과 그 하수인은 당장 희희낙락할지 몰라도 앞으로 윤 총장이 내려놓은 결과의 무게를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민심이반을 경고했다. 주호영 원내대표는 이날 오후 기자들과 만나 “불의하고 무도한 정권이 핍박과 축출 시도로 일국 공권력의 상징인 검찰총장마저 축출하는 데 이르게 됐다”며 “윤 총장과 힘을 합쳐 대한민국 헌법과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한 노력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윤 총장 사퇴로 이어진 정부·여당의 검찰개혁 밀어붙이기에 대한 비판도 이어졌다. 배 대변인은 “이 정권은 ‘검찰개혁 적임자’의 칼날이 자신들을 향하자 인사 폭거로 식물 총장을 만들다 못해 아예 형사사법시스템을 갈아엎고 있다”며 “헌법정신과 법치시스템이 파괴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윤 총장의 회한이 짐작된다”고 말했다.
국민의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은 윤 총장 사퇴에 앞서 이날 언론 인터뷰에서 “(윤 총장이) 자연인이 돼서 보자고 하면 볼 수 있을 것”이라며 윤 총장 영입 가능성을 시사했다. 김 위원장은 “그 사람이 실제 정치를 하고 싶어하는지 안 하고 싶어하는지는 아무도 모르지 않느냐”면서도 이같이 밝혔다. 김 위원장은 윤 총장에게 “직을 내려놓고 당당하게 처신하라”고 했던 정세균 국무총리를 향해서도 “그거를 일방적으로 몰아치면 정상이 아니다”며 윤 총장 편에 섰다. 김 위원장은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 출신으로 윤 총장 부친인 윤기준 연세대 명예교수와 학계에서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가 4·7 보궐선거에서 서울시장에 당선될 경우 야권 정계개편의 핵심으로 부상할 것으로 평가받는 가운데, 윤 총장이 안 대표와 손을 잡을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정치권에선 안 대표가 국민의당 소속으로 서울시장이 되면 국민의힘과 연대하지 않고 제3지대 구축에 더욱 힘을 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이 경우 윤 총장이 안 대표의 제3지대 세력과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안 대표는 그간 윤 총장에 대한 적극적인 지지 의사를 표명해왔다.
안 대표는 윤 총장 사퇴 직후 입장문을 내고 “상식과 정의를 위해 치열하게 싸워 온 윤 총장님, 그동안 수고하셨다”며 “하지만 진짜 싸움은 이제부터다. 헌법정신과 법치주의를 지키려는 윤 총장님의 앞날을 국민과 함께 응원하겠다”고 밝혔다.
장혜진·배민영·곽은산 기자 janghj@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