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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못한 北 적극공세에 ‘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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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F성명 ‘금강산, 10·4선언’ 삭제 파문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의장성명 삭제 파문이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국제 공조를 통해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사건에 대한 대북 압박을 펼치겠다던 이명박 정부의 구상이 북측의 적극적 저지 공세에 무산된 꼴이기 때문이다. 당장 치밀한 전략 없이 안이하게 접근한 정부의 외교력에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국제적 망신만 초래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허술한 외교로 냉전시대의 남북 대결구도만 드러내 한국 외교의 신뢰를 손상하고 남북관계는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번 사건의 근본적 원인은 북한의 움직임이라는 변수를 생각하지 못한 정부의 미숙한 전략에 있다는 지적이다. 우리 정부는 ARF가 열리기 전부터 금강산 사건 해결을 위해 ‘국제 공조’를 동원하겠다고 천명한 뒤 ARF에서 이를 의장성명에 포함하는 방안을 추진하겠다는 구상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북한의 대응은 예상하지 못했다. 박의춘 북한 외무상 일행은 우리 정부의 움직임을 본 뒤, ARF 참가를 ‘공식 방문’으로 전환하고 싱가포르를 상대로 집요한 외교전을 펼친 것으로 알려졌다. 외교통상부 고위당국자는 27일 “북한은 회의 초부터 10·4선언 관련 조항의 의장성명 포함을 강하게 추진했다”고 말했다.

북한은 이런 노력으로 ARF 의장국인 싱가포르가 만든 초안에 있던 “남북정상회담과 10·4선언을 환영했다”는 조항에다 “10·4선언에 ‘기반한’ 남북대화 진전을 지지한다”는 내용을 추가하는 데 성공했다.

일각에서는 ‘북한과의 외교전서 완패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초안에 ‘10·4’가 들어간 것에 대해선 개의치 않았다”며 “그러나 남북대화를 촉구하는 조건부 뉘앙스가 있는 ‘기반한’이라는 문구는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판단해 고민 끝에 (싱가포르 측에) 수정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이 문구를 빼기 위한 우리 정부의 노력은 결국 금강산 관련 조항까지 함께 삭제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다른 당국자는 “싱가포르와의 우호 관계만을 믿고 방심하다 발생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회의 석상에서 금강산 문제가 여러 차례 거론돼 충분한 성과를 거뒀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비판 여론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금강산 사건을 ARF 의장성명에 넣겠다고 총력을 펼치다가 나중에 어쩔 수 없이 문구 삭제를 수용한 과정은 국제적인 망신거리다.

백진현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금강산 사건이라는 단발성 사건을 의장성명에 넣겠다고 한 전략 자체가 신중하지 못한 것”이라며 “지나치게 국내 정치를 고려한 것으로 보이고, 일을 처리하는 과정도 미숙했다. 이런 식으로 하면 우리에 대한 다른 나라의 신뢰가 떨어진다”고 말했다.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도 “우리 정부가 북한의 대응 공세를 감지하지 못했거나 예측하지 못했다면 비판받을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상민 기자

21sm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