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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포럼] 가족, 그 어떤 것보다 아린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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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과 핏줄 이데올로기
‘해피 패밀리’와 가족의 관성
“만약에 말이오. 가족들과 회사가, 어느 날 배꼽, 그러니까 탯줄이 떨어지는 것처럼 당신에게 완전히, 깨끗하게 떨어져 나간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소?”

박범신 장편소설 ‘소금’에서 가출한 아버지가 던지는 질문이다. 부양의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다면, 그리하여 평생 어깨를 짓눌러온 일터의 노동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다면 어떤 기분이 들겠느냐는 말이다. 더 나아가 핏줄이라는 ‘이데올로기’로부터 해방되어 가족들이 거리에서 만나는 이들과 더 이상 특별히 다르지 않은 존재로 다가온다면 어떤 느낌이겠느냐는 것이다.

조용호 논설위원
소설 속 아버지는 어느 날 세 딸과 아내, 재벌 회사의 상무 자리까지 모두 던져버린다. 그가 묵묵히 지나온 길을 따져보니 자식과 아내의 ‘통장’ 노릇뿐이었다. 그의 아내는 거대한 소비사회의 단맛에 철저하게 길들여진 존재였다. 세 딸에게도 아버지는 투명인간 같은 존재였다. 어느 날 아버지가 갑자기 종적을 감추자 아내는 휘청거리고 딸들은 흩어진다.

그 아버지는 유랑하는 트럭 행상 일행을 만나 새로운 가족을 형성한다. 다리 저는 여인, 구루병에 걸린 딸, 눈이 멀어가는 더 어린 딸,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는 장애인 남자를 가족으로 받아들인다. 모두 법적인 가족은 아니다. 오다가다 만난 인연일 따름이다. 이들 속에서 가출한 아버지는 오히려 큰 평화를 얻는다. 박범신은 그의 삶을 이렇게 진술한다.

“가진 게 있으면 먹고, 쓸쓸할 때면 쓸쓸한 사람들 손을 잡았으며, 기분이 아늑해지면 구부리고 잠들었다. 진실로 유장한 시간의 강을 따라 자신이 가벼이 흐르고 있다고 느꼈다. 그것은 자연으로서의 삶이었으며 자본주의적 체제의 정교하고 잔인한 프로그램에서 놓여난 삶이었다.”

고종석 장편소설 ‘해피 패밀리’도 핏줄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쪽이다. 부모가 교통사고로 한꺼번에 사망하고 딸 하나만 덩그러니 남는다. 맡아 키우겠다는 친척이 아무도 나서지 않자 죽은 엄마의 절친이 입양한다. 그 절친에게도 이미 1남2녀의 핏줄이 있었다. 하지만 그 절친 여자는 선한 의지와는 별개로 본능에 기대어 친구의 딸을 ‘가사도우미’쯤으로 부려먹었다. 그이의 장남은 입양된 누이를 내내 감싸고돈다. 그 장남은 몸으로, 치명적인 사랑으로, ‘핏줄’이라는 구속에 반발하는 인류애의 표본이다.

이탈리아 남부의 몬테그라노는 핏줄 이데올로기의 정수를 보여주는 도시로 꼽힌다. 이 지역사회는 가족이라는 집단 밖 모든 사람은 잠재적인 경쟁자이자 적으로 인식하는 성향이 강하다. 가족이 아닌 모두를 항상 경계하며 도덕적 의무는 자신의 핵가족 구성원에 대해서만 지는 고립된 가족주의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패밀리를 중시하는 이탈리아 마피아의 전형적인 특성이다.

혈연을 강조하는 마피아 스타일의 가족 개념도 깨지기 시작한 지 오래다. 프랑스에서는 법률혼이 눈에 띄게 줄고 공동생활약정이 늘고 있다. 법률혼 밖에서 태어난 프랑스 아이들은 2008년에 절반이 넘는 51.6%에 이르렀다. 어떤 가정 형태에서 태어나더라도 편견의 대상이 되는 경우는 드물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과거에 비해 이혼과 재혼이 자유로워지면서 혈연 중심의 가족관에서 벗어난 다양한 가족 형태가 등장하는 추세다.

사실 가족만큼 서로 사랑하고 미워하는 관계도 찾기 힘들다. 혈연이어서, 운명이어서 가까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지만 오히려 그런 기대 때문에 남보다 더 밉고 원망스러운 존재로 돌변하기 쉽다. ‘핏줄’이라는 본능의 콩깍지를 벗어던지는 순간 오히려 가족에게 평화가 깃들지도 모른다. 피차 의무와 집착에서 벗어나면 오히려 가족 구성원의 실체를 제대로 보면서 배려하고 존중할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룰 가능성도 높다.

고종석은 “그 어떤 것보다 아리게 우리를 둘러싸는 말, 가족, 그들을 지금까지 함께 살게 한 것은 그저 관성이었을지도 모른다”고 썼다.

조용호 논설위원